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편입을 준비하면서 내가 포기했던 것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 시기에만 즐길 수 있는 청춘의 즐거움과 감성들을 놓쳤다.
그저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만 했고, 후회와 아쉬움으로 과거를 회상하며 어두컴컴한 밤하늘만 걸었다.
편입이 뭐라고. 이 편입을 위해 이렇게까지 대가를 치를 줄이야.
20대의 절반이 이렇게 회색빛으로 물들 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전부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이 정도로 내 청춘을 낭비할 줄은 몰랐다.
지금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나는 편입을 절대 안 했을 것이다.
공부도 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껏 청춘을 즐겼겠지.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편입만 합격하면 행복해질 거라 굳게 믿었던 사람이었다.
무지하면 오히려 용감하고, 무서울 정도로 집념이 세다고 했던가.
그 당시의 나를 지금의 내가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렇게, 다시는 학교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근로알바도 그만두었다.
알바를 그만두고 나니 남은 시간은 대략 2주.
지금까지 공부했던 내용들을 계속해서 정리하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러 일주일도 남지 않게 되었다.
편입 시험을 보려고 한 대학은 총 4개가 있었다.
지방 국립대 하나, 지거국 둘, 그리고 서울의 상위권 대학 하나.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서울 상위권 대학은 지거국과 일정이 겹쳤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나는 서울 상위권 대학의 편입 기출문제들을 보고 내 수준을 깨달았다. 내가 공부해 온 수준으론 저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을.
기출문제에는 공학수학도 간혹 나왔는데, 나는 공학수학을 전혀 공부하지 않아서 풀 수가 없었다.
올해에 안 나올 확률도 높았지만, 그 확률 하나에 내 청춘을 바친 대가를 걸 순 없었다.
나는 당연히 안전한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수도권 대학은 아예 아웃이고 지방 쪽 국립대학들이 3개 남았다.
나에게 남은 총알은 겨우 3발.
이 3 발안에 내 1년도 더 넘은, 아니 내 청춘을 바친 노력들이 담겨 있었다.
첫 발은 부산에서의 면접으로 시작되었고, 두 번째 총알 역시 부산이었다.
나는 꼭 명중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무장했고, 결전을 위해 부산에 숙소를 잡았다.
드디어, 내 노력의 결실을 맺을 날이 다가왔다.
첫날에 치르는 시험은 필기시험이 없는 대학이었다.
서류는 당연히 합격했고, 면접만 보면 되는 시험이었는데 12명 중에 2명만 뽑히는 시험이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면접 관련해서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냥 전공 관련 질문만 나오겠거니 생각하고, 면접장 가면 알아서 잘 대답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용감함이기도 했다.
딱히 가고 싶은 대학은 아니었고, 그저 안전빵으로 넣어놓은 대학이라 그랬던 걸까?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함께 면접장으로 향했다.
이 자신감은 면접장에 가서 약간 누그러지긴 했다.
여러 명의 지원자들이 어느 방에서 긴장한 채 앉아있고, 각자 한 명씩 호출되어 면접 대기실로 들어가고, 그 대기실에서 다시 면접장으로 향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한 번 꼬아놓은 이유는 면접 질문과 주의사항을 10분 전에 미리 안내해 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면접 질문은 10분 전에 미리 알려주는 만큼, 생각보다 어려웠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한 질문은 전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 당연하지만, 그때만 해도 4차 산업혁명은 한창 떠오르는 핫이슈였으니.
다행히, 편입공부를 하면서 전공공부만 한 게 아니라 책도 좀 읽었어서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는 있었다.
면접관으로 보이는 분들은 딱 봐도 교수님들이었는데, 교수님들의 반응이 되게 좋았다.
그 반응을 보고,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 이거 합격이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면접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알 수 없는데 뭘 그리 확신했던 걸까?
면접 점수가 합격에 그렇게 큰 영향이 없고, 이미 서류만으로 충분한 점수를 얻어서였던 걸까?
서류가 거의 70 ~ 80점을 차지했고 면접은 20점 밖에 차지하지 않는 시스템이었는데, 나는 서류는 거의 만점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느 정도 근거를 얻게 되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고, 그만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른 두 군데를 다 떨어지더라도, 최소한 이 대학만큼은 다닐 수 있겠구나.
이 정도 대학만 되더라도 나는 그럭저럭 만족은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직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 시험을 위해, 나는 빠르게 점심을 먹고 휴식을 잠깐 취한 뒤, 숙소로 향했다.
지방거점국립대학, 부산 근처라고 하면 솔직히 이제 대학 이름을 말해도 될 것 같다.
내가 첫째 날에 면접을 본 대학은 부경대학교였고, 둘째 날에 시험 칠 대학은 바로 부산대학교였다.
셋째 날에 볼 대학은 경북대학교. 이렇게 세 곳이 전부였다.
첫째 날 부경대 면접을 보고 난 후, 나는 부산대 근처 숙소로 향했다.
5시에 거의 바로 숙소로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부경대학교는 그렇게 가고 싶었던 대학은 아니었기에 딱히 긴장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산대는 내가 목표로 잡았던 대학이었고 꼭 가고 싶은 대학 중 하나였기에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서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1년 넘게 준비하였고, 당장 내일이면 내 운명이 판가름 나는 것이다.
드디어, 20대의 거의 절반을 바치면서까지 목표로 삼았던 이 길이 끝나겠구나.
나의 죄책감과 서러움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겠구나.
그 당시의 나는 부산대학교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지금도 충분하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합격확률을 높이고자 열심히 공부했다.
저녁은 대충 숙소 근처에서 뼈해장국을 하나 사 먹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공부를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저녁 8시부터 점점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갑자기 북받쳐 오르면서 가슴이 약간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눈에는 눈물이 조금씩 고이기 시작하는데, 힘들거나 우울하지는 않았다.
영문모를 이 감정의 흐름 속에서, 갑자기 별안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일 뭔가 시험을 망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아.'
처음에는 또 나의 나쁜 버릇이 나온 것으로 생각했다.
인생에서 항상 중요한 시기에, 도망치는 한심한 버릇.
내일 시험을 망치더라도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가 아닐까? 라며 의심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런 감정으로 치부하기에는 내 마음속에 뭔가 기쁨이 차올랐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하기에는 순수한 기쁨과 긍정적인 감정이 넘쳐흘렀고 가슴이 벅찼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왜 가장 중요한 시험 전날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정체 모를 이 감정과 상황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공부할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순된 감정은 지금은 모르겠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지금은 당연히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공부가 더 이상 안되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충분히 할 만큼 해서 더 이상 공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암기노트를 눈으로 한 번 더 훑고 나니,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시험을 망쳐도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은 그 기분도 이유는 간단하다.
과정에 최선을 다했기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
만약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아.. 내가 조금만 더 공부했으면 붙었을지도 모르는데..'라는 생각과 미련이 남았을 것이고, 결과가 안 좋게 나왔다면 더욱더 후회를 많이 했을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부산대학교 편입시험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난이도의 시험이겠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던 나에게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커다란 장벽이었다.
1년을 더 대학에 다니면서까지 공부를 했던 나는 더 할 게 없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딱 이만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적어도 후회나 미련은 없을게 분명했다.
만약 불합격을 한다 하더라도, 편입을 준비하면서 나도 모르게 길러진 '성실함'이라는 재산은 남을 것이었다.
비록 편입에 실패했을지 언정, 그것이 내 인생을 완전히 곤두박질로 치게 만들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나의 '성실함'과 '강인함'이 다시 내 인생을 이끌어줄 테니까.
그때 당시에는 이것이 무의식적으로 느껴졌기에 내 감정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벅차오른 가슴과 함께 격앙되면서도 평온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밤을 보냈다.
시험 당일 아침이 되자, 이상하게 마음은 차분해졌다.
긴장은 되었지만, 떨리지 않는 마음으로 침착하게 시험에 응했다.
그렇게, 나는 편입을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