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 작성

도대체 무슨 경험을 토대로 작성해야 하는 걸까

by Nos

졸업을 앞둔 두 달, 민기의 시계는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흘렀다. 가고 싶은 기관의 공고를 열어보았을 때 느꼈던 그 서늘한 충격—필수 자격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초라한 성적표—이 민기를 채찍질했다. 냉혹한 취업 시장의 현실은 달콤한 방학의 꿈을 단숨에 깨워버렸고, 민기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존 본능으로 책상 앞에 자신을 결박했다.


그 독기 덕분이었을까. 민기는 유례없이 집중력을 발휘해 기사 자격증 필기시험을 한 번에 통과했다. "제대로 하면 안 될 것도 없네." 민기는 짧은 성취감을 맛봤다. 하지만 기쁨은 찰나였다. 필기라는 산을 넘자마자, 그보다 더 높고 험준한 '자기소개서'라는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민기는 작년의 체험형 인턴 채용공고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말하길, 자소서 문항은 미리 정리해두지 않으면 공고가 쏟아지는 시즌에 제풀에 지쳐 떨어진다고 했다. 민기가 수집한 공통 문항들은 다음과 같았다.

지원 동기와 인턴 기간 동안의 목표

단체 활동 중 갈등 해결 및 협력 성과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해결 사례

직무 관련 본인의 노력과 준비 과정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민기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갈등? 협력? 성과?' 대학 생활 내내 섬처럼 지냈던 그에게 '단체 활동'이란 기껏해야 조용히 제 몫의 자료조사만 해가던 조별 과제가 전부였다. 큰 소리가 오간 적도 없었고, 드라마틱한 반전으로 성과를 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일상의 소소한 불편함을 넘어 사회생활의 역량으로 치환될 만한 '문제 해결'의 경험이 그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인공지능에게 슬쩍 문항을 던져보기도 했다. AI는 1초도 안 되어 매끄럽고 완벽한 문장들을 뱉어냈다. 하지만 그 글들은 민기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번지르르해서 오히려 비어 보이는, 영혼 없는 껍데기 같았다.

군데군데 어색한 문장들도 보였다.

"AI가 쓴 걸 인사담당자들이 모를 리 없겠지."


막연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인맥이 전무한 그에게 첨삭을 부탁할 선배나 지인은 없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합격 자소서들은 2,000원에서 많게는 10,000원이 넘는 결제창 뒤로 꽁꽁 숨겨져 있었다. 정보조차 돈으로 사야 하는 현실이 씁쓸했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최신 자소서 비법서들은 이미 민기 같은 졸업 예정자들이 싹쓸이해 간 뒤였다.


결국 민기는 오랜만에 집을 나섰다. 단순히 책 한 권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답답한 상태를 뚫어낼 돌파구가 간절했다. 목적지는 번화가의 대형 서점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서점 입구에 들어서자, 특유의 종이 냄새와 차분한 공기가 민기를 맞이했다. 편입 준비와 전공 공부에 매몰되었던 지난 몇 년간, 서점은 민기에게 사치스러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마주한 서점은 어수선함마저 활기로 다가왔다. 매끄럽게 진열된 책등의 화려한 색채들이 민기의 무채색 일상을 자극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새 책들의 냄새는 자뭇 향기로웠다.


원래 목적은 취업 수험서 코너였지만, 민기의 발길은 자석에 이끌리듯 소설과 에세이 매대에서 멈췄다. 요즘 책들은 표지 디자인부터가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한 권 한 권 넘겨보며 문장들을 눈에 담다 보니, 10분도 안 되어 사고 싶은 책이 일곱 권을 넘겼다. 당장이라도 전부 결제해 침대 맡에 쌓아두고 싶었지만, 무거운 가방과 가벼운 통장 잔고가 그를 만류했다. 민기는 아쉬움을 삼키며 가장 마음을 울리는 소설 한 권만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취업 관련 코너로 이동하자 공기는 돌연 무거워졌다. 소설 코너의 화사함은 온데간데없고, 둔탁하고 두꺼운 수험서들이 성벽처럼 쌓여 있었다. 토익, 기사, NCS, 자소서……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의 수만큼이나 많은 합격의 기술들이 그곳에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 책들을 징검다리 삼아 사회라는 강을 건너갔을 것이다.

그들과 같은 과정을 민기는 지금 밟고 있는 것일까? 다들 이런 감정을 느끼고, 꾹꾹 참은 과정이 있었겠지?


민기는 신중하게 자소서 관련 책들을 비교했다. 논리적인 문장 작성법을 다룬 이론서 한 권과, 다양한 직무의 합격 사례를 분석한 예시집 한 권을 골랐다. 인터넷의 파편화된 정보보다 종이에 인쇄된 정교한 지식이 훨씬 믿음직해 보였다. 전문가가 쓴 가이드라인과 내용들이 마음에 들었다.


두 권의 수험서와 한 권의 소설책. 묵직한 봉투를 손에 쥐고 서점을 나서는 민기의 발걸음은 올 때와는 사뭇 달랐다.

물론 이제 겨우 문장 하나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 단계일 뿐이었다. 가야 할 길은 멀고, 여전히 민기는 소속 없는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어깨에 느껴지는 책의 무게는 민기에게 묘한 책임감과 자신감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민기는 다짐했다.

올해 안에 무조건 어느 기업의 정규직이든 합격하여 일하겠다.


약간은 묵직해진 가방의 무게를 느끼며, 민기는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민기는 한참 동안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손에 들린 것은 자소서 비법서가 아닌, 아까 충동적으로 집어 든 소설책이었다. 처음엔 결연한 의지로 자소서 책을 펼쳤으나 의욕은 금세 휘발되었다. 아직 뚜렷한 마감 기한이 정해진 게 아니다 보니, 과제 제출 직전의 그 팽팽한 긴장감이 생길 리 없었다. 억지로 활자를 머릿속에 밀어 넣으려 애쓰던 민기는 어느 순간 깊은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이거, 읽다 보니 생각보다 별거 없잖아.'

비법서에 실린 예시 문항들은 하나같이 '자소서 쓰기에 최적화된 인생'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이 문항들이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살기라도 한 듯, 봉사활동이나 해외 연수, 공모전 같은 화려한 재료들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어떤 질문이 던져져도 정답처럼 내놓을 수 있는 스토리가 넘쳐났다.


그에 반해 민기의 지난 4년은 여백이 너무 많았다. 대학 시절 내내 사람들과 섞이기보다 혼자만의 침묵을 선택했던 그에게 '에피소드'란 사치였다. 갈등 해결? 팀 프로젝트 당시 의견 차이가 생길 때마다 그저 "그렇게 하자"며 입을 닫아버렸던 소극적인 배려가 갈등의 전부였다. 문제 해결? 풀리지 않는 전공 문제를 붙들고 밤을 새웠던 지루한 사투가 그나마 내세울 만한 고집이었지만, 그걸 사회생활의 역량으로 포장하기엔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책 속의 그들은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아니, 사실 그들에게는 적을 경험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버릴지 고민하는 행복한 비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읽으면 읽을수록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는 법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AI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럴듯한 껍데기를 만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알맹이가 없었다.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해도, 민기의 경험은 너무나 소박하고 평범했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민기는 결국 자소서 책을 덮고 추리소설을 펼쳤다. 거침없이 전개되는 사건과 주인공의 논리적인 추리 과정은 현실의 늪에 빠진 민기를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주인공의 명쾌한 해답을 보며 민기는 잠시 망상에 빠졌다. 자신의 인생도 이렇게 논리적이고 확실한 인과관계로 구성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리가 없지. 내 인생이 소설 같았다면, 난 무조건 불합격일 거야."

민기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남들이 직무 역량을 쌓고 자소서를 갈고닦으며 인생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가는 동안, 자신은 이렇게 팔자 좋게 누워 가상의 범죄 사건이나 쫓고 있다니. 찰나의 즐거움 뒤로 자괴감과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고 싶은 곳은 자격 요건의 문턱이 너무 높았고, 지원 가능한 곳은 채용 공고조차 뜨지 않은 채 침묵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보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민기를 더 괴롭혔다. 민기는 소설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끊임없이 시계를 확인했다.

아무것도 소속되지 않은 채 붕 떠버린 시간 속에서, 민기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것은 추리소설의 트릭을 풀어내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지루한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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