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로써 욕망하고 일하고 싶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르포르타주를 쓴 김민섭 작가님의 후속작 <대리사회>를 읽었습니다.
지방대 시간강사를 했던 김민섭 작가님이 대학을 그만두고 대리운전을 시작하면서 본인이 겪은 이야기를 나타낸 작품입니다.
단순히 대리운전을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소소하게 이야기하는 일상 에세이가 아니라, 비평을 하는 사회비평칼럼에 가깝습니다.
(알라딘에서는 사회비평/칼럼으로 이 책을 분류했더군요.)
이 책을 관통하는 주요 내용은 ’을‘의 서러움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작가님은 이걸 대리운전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통찰력 있게 풀어냈습니다.
타인의 운전석에 앉는 대리기사는, 차의 주인 ‘갑’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 차의 기본세팅조차 건드리지 못하고 말이나 대화조차도 ‘갑’에 맞추어 말을 하게 되는 상황.
마치, 상사에게 일방적인 업무 지시를 받는 부하직원의 자세를 갖게 된다는 것이죠.
타인의 운전석은 그 자체만으로, ‘을’의 자리에 앉게 하여 ‘갑’을 위한 업무(운전)를 수행하게 됩니다.
돈을 받고 하는 행위니까 당연하지만, 그래도 뭔가 폭력적이고 서글픈 상황인 거죠.
원래 지방대 시간강사였던 작가님이, 대학을 나와서 거리로 나와 온몸으로 대리운전을 하며 겪은 이야기.
작가님의 부드럽고 세심하면서도, 사회를 궤뚫는 통찰이 재밌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중에, 인상 깊었던 문장 몇 가지만 소개해보고 싶습니다.
모두가 존중할 만한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에 없던 자각, 노동은 그러한 성찰을 가능케 했다.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서, ‘노동자’로 사회에 나왔을 때 비로소 사회의 쓴맛을 맛보게 됩니다.
나이로 어른이 아닌, 진정한 ’ 어른‘이 되는 과정은 이 사회에서 본인의 노동을 통해 자신을 책임질 때서야 시작됩니다.
그렇게, 노동을 시작하게 되면 모든 노동자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동을 하고 있으며, 세상에 필요 없는 노동은 없고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 자각은 다양한 노동 현장을 경험할수록 더욱 깊어지고 세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공공기관 계약직과 인턴만 할 때보다 그 외의 조직들을 경험했을 때 훨씬 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고 그 정당한 대가로 삶을 영위하는 걸 본 순간, 사람 자체에 대한 존중심이 생겨났습니다.
사회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월급을 떠나서, 그들은 모두 존중할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 깨닫게 되었거든요.
교수자가 강의실의 유일한 주체가 되어 말을 쏟아내는 순간 그 안의 학생들은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가 되어버린다. 스스로 사유하기를 멈추고 영혼 없는 대답만 기계적으로 하게 된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는 질문에 주체적으로 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학생들은 강의실 밖으로 나오며 오히려 사유와 발화의 자유를 되찾는다. 마치 운행을 마친 대리운전기사처럼 다시 운전한 몸으로 돌아온다.
교수님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강연 현장에서, 학생들은 그저 대리운전기사처럼 운전석을 빼앗긴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수님의 생각과 반대되는 입장의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운전기사가 대리 콜을 한 주인에게 함부로 대들 수 없는 것처럼요.
학생들은 강연실에서 강연을 듣지만, 사실은 교수님의 생각과 의견을 주입당할 뿐이며 운전은 그저 교수님이 할 뿐입니다. 이런 일방적 강연을 탈피하고자, 학생 참여형 강연을 하시는 교수님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심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미숙한 초보운전인 학생의 운전에 강의가 산으로 가는 일도 생기죠.
교수가 학생에게 운전석을 넘겨주되, 운전이 잘 되도록 하려면 운전연수를 해주는 것처럼 아주 세심한 지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교수님 입장에서는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고, 기본적으로 '연구자'입장이기에 시간을 많이 뺏기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교육 형태가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학생들은 스스로 사유하는 기회를 뺏기고 맙니다.
나에게는 나의 호칭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 대학이라는 공간에 젖어 있던 나의 신체를 우악스럽게 현실로 잡아끌었다. 나는 지금 대학이 아닌 거리에, 그리고 세상에 있다. 아저씨에 익숙해져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뛰었다.
선생님, 교수님으로 불리던 작가님이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을 때 솔직히 당황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앞의 호칭보다는 좀 거친 느낌이 드니까요.
하지만, 사회는 대학교보다는 좀 더 냉정하고 잔혹한 곳입니다.(물론, 대학원생 이상의 연구실도 사회이고 훨씬 냉혹할 수도 있음을 압니다.) 그 거리에서는 타인이 자신의 요구를 잘 듣지 않으면 욕설이나 고성이 오갈 수도 있는 곳이죠.
거친 생태계에 무작정 뛰어든 작가님이 적응하기 위해 뛰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운동'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헬스장에서는 힘들면 언제든 러닝머신에서 내려올 수 있고, 어느 한계까지 나를 내몰고서도 곧 쉬고 싶은 만큼 쉴 수 있다. 하지만 노동은 내 몸의 형편을 돌봐주지 않았다.
운동은 정해진 강도와 횟수로 진행을 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하다가도 힘들면 언제든지 내려와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노동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피곤해도, 꼭 끝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몸살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끝마쳐야 하는 것.
이미 근육이 파열되었음에도 계속해서 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는 운동장이 아니라, 전쟁터니까요.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당연히, 고용인에게 고용되어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주도적으로 일하더라도, 조직 구조상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운전을 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본인이 성취한 것에 비해 훨씬 못한 보상을 받기도 하는 이 운전석은, 결국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기계처럼 운전을 하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열정페이를 강요하면서, 흔히들 하는 말이죠.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라.
이런 말을 하는 분들에게 항상 묻고 싶습니다. 당연히, 처음 조직이나 구조 자체를 만든 '주인'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일부에 해당하는 추가 보너스도 주고 그런 말을 하는지.
물론, 어떤 의미에서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하는 말인지 알고는 있습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배우고 일을 하는 자세를 갖춘 사람이 승승장구하고 인생에서 더 많은 점을 배운다는 것도 말이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말 '주인'이 받는 것과 같은 보상의 일부라도 받아야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젊을 때 열심히 일해서 나쁠 건 없다만, 일말의 보상도 주어지지 않은 채 추가적인 노동을 하는 모습은 솔직히 어떻게 포장하더라도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 반드시 폭언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내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부당한 사회 구조에, 누군가는 고쳐야 한다며 나서려는 그때,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갑'보다는 또 다른 '을'일 때가 많습니다. 특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갑'이라는 위치로 올라서게 되는 대개의 조직은 더더욱 그렇죠.
누군가 '을'의 서러움을 못 참고 개혁을 외치며 나섰어도, 그 개혁에 같이 동참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저냥 참고 살아가죠. 그 '참고 살아감'도 결국은 그 사람과 선을 그음으로써 동참하지 않겠다는 선택인 겁니다. 서글픈 현실이죠.
그러고 보면 을의 자리에서는 단어 하나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좀'이라는 부사 하나로도 나는 오만 가지 상상을 했다. 많이, 적당히, 조금, 이런 모호한 부사들은 듣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다. 우리는 갑의 자리에서 별생각 없이 툭툭 말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헛기침이나 하품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말조심'은 을이 아니라 오히려 갑이 더 해야 하는 것이었다.
직장인 여러분은, 직장상사의 기분에 따라 자신의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보셨을 겁니다. '갑'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헛기침을 했을 뿐임에도, '을'인 여러분은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걱정을 해야 했던 경험. '갑'은 무심해도 되지만 '을'은 세심해야 하는 이 권력 구조 속에서, 조심해야 하는 주체는 오히려 '갑'이어야 한다는 통찰이 흥미로웠습니다.
내 말과 행동에, 누군가가 그렇게 노심초사한다면 '갑'인 제가 한 번쯤 배려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귀신처럼 '갑'의 위치에 있을 때, 이를 자각하고 편안하게 행동을 하며 배려심을 덜 발휘합니다. '갑'이 진짜 농담으로 하는 말도, '을'은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죠.
누구나 '을' 일 때는, 눈치를 보면서 싹싹하게 행동하고 배려하죠. 그 사람이 진정으로 배려심 깊고 사려 깊은 사람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그가 '갑'일 때도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이사한 집에 책상을 설치하러 오신 기사님이 지나치게 깍듯하더군요.
조금은 늦은 시간인 저녁 9시 반에 설치하러 오셨는데, 설치가 끝나고 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고, 늦은 시간인데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기사님이 늦은 밤까지 일하시는 게 힘드실까 봐, 이렇게 대답했죠.
"기사님도 고생이시죠. 밤늦게까지 설치하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아휴, 늦게 오면 짜증 내고 화내시는 분들도 많으신데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놀랐습니다.
책상을 설치하러 오신 기사님들한테, 밤늦은 시간이라고 짜증 내고 화내는 분들이 있다는 걸요.
제가 설치까지 해주는 책상을 구매한 게 처음이라, 밤늦은 시간에 와주셔도 고마워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다른 분들은 생각이 달랐던 걸까요? 어차피, 본인이 지불한 돈에 설치비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기사님이 본인의 휴식시간을 침해한 거 같아 짜증을 낸 것일까요?
늦은 시간에, 쭈뼛쭈뼛 깍듯하게 오시는 기사님의 태도도 대리기사와 비슷했습니다. 타인의 운전석이 아닌, 거주지에 오는 순간 알게 모르게 '을'이 되어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걸.
조심조심 조립하시는 모습은 직업 에티켓이기도 하지만(함부로 다른 가구들을 파손해서는 안되니까요.), 그간 눈치를 받으며 만들어진 모습 같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대부분, '돈'을 지불하는 입장이 되면 '갑'의 위치에 오르게 되어 온갖 폭력을 행사하곤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굉장히 큰 힘을 가지기에, 어쩔 수 없는 이런 권력 구조가 생겨나죠. 특히, 기업과 기업 간의 거래에서 이런 갑질은 직장인들에게 아주 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갑’의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직장인들은 얼마 되지 않기에, ‘을’의 서러움을 가진 직장인들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다시 돈을 지불하고 ‘갑’ 질을 하게 됩니다. 이런 구조속에서 우리들은 모두 대리기사처럼 ‘주체’로의 자격은 박탈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님은 대리기사를 수행하면서, 자신을 ‘을’ 취급하기보다 같이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누고 배려해 주신 분들이 고마웠다고 합니다.
기꺼이 ‘갑’의 위치에 있을 수 있으면서도, 전혀 그런 권력구조를 취하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사람.
그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네요.
이 사회 전체를 대리기사와 같은 ‘타인의 운전석’으로 비유하여 색다른 통찰을 안겨준 작품.
작가님의 에피소드도 재밌지만, 좀 더 배려심 있고 나은 인간이 되어야겠다는 반성도 하게 해 주어 정말 재밌고 의미 있게 읽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