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다시 해석한 월든 에세이.
1845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문명의 소음을 뒤로하고 월든 호숫가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스스로 지은 세 평 남짓한 오두막에서 보낸 2년 2개월. 그가 수행한 실험의 목적은 명확했습니다. 삶의 껍데기를 깎아내고 오직 본질만을 마주하는 것이었지요. 그 사색의 기록인 《월든》은 1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 생태주의와 미니멀리즘의 원류가 되어 우리를 깨우고 있습니다.
물론 19세기의 문장들이 오늘날의 번잡한 도시 생활과 완벽히 맞닿기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는 여전히 보석처럼 빛납니다. 《도시인의 월든》은 삶의 속도를 늦춘 저자가 소로의 문장들을 징검다리 삼아, '현대'라는 복잡한 숲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나답게 살아가는 법을 탐구한 정직한 기록입니다.
이 책은 현대적인 환경 안에서 어떻게 소로처럼 살 수 있을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고민합니다. 높은 학력과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던 저자가 택한 이례적인 행보는 누군가에게 의아함을 자아낼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노동과 소득 대신, 더 적은 지출과 소박한 일상을 선택한 모습은 '성공'의 정의가 획일화된 우리 사회에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장 곳곳에 녹아있는 저자의 일상은 역설적으로 그 누구보다 충만해 보이며,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의 단단한 힘이 느껴집니다. 화려한 타이틀을 뒤로하고 시골에서의 삶을 결정하기까지, 저자에게도 적지 않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 고독한 선택의 순간마다 《월든》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주는 든든한 이정표가 되어주었겠지요.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소로의 문장을 맹목적으로 긍정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소로의 극단적인 행보에 의문을 던지기도 하고, 19세기가 가진 시대적 한계를 냉철하게 짚어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정해준 정답이 아닌 '나만의 진실'을 찾고자 했던 소로의 태도는, 시대를 관통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합니다.
《월든》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그리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나만의 오두막을 짓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이제, 저자가 소로와 나누었던 대화의 파편들을 책 속의 문장을 통해 하나씩 되짚어 보겠습니다.
그 누구도 자격이 있어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 삶은 유능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불완전하고 모호한 그 상태로 그대로 살아남을 공간이 있다. 이것이 내가 발견한 『월든』의 이상한 위로이며, 이 책에 담은 이야기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의 탄생에는 대단한 의미 같은 건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어느 화창하거나 혹은 우울한 날에 우연히 시작된 생명일 뿐이니까요. 이 우연한 삶을 어떻게든 귀하게 만들어보려 우리는 참 열심히도 살아갑니다. 상처 하나 없는 완벽한 행복을 완성하려 애쓰면서 말이죠. 하지만 실제의 삶은 우리가 그린 도안처럼 깔끔하게 잘려 나가지 않습니다. 삶만큼 모호하고 뒤엉킨 실타래가 또 어디 있을까요?
『월든』은 그 엉킨 실타래를 억지로 풀지 않아도,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삶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소로 또한 책 안에서 생각이 왔다 갔다 하고 꼭 일관성 된 내용을 말하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소소한 이유로 그다지 합리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은 선택을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삶의 실제 이야기는 적자생존처럼 단순하지 않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선택, 사소한 감정 하나에 이끌려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분명 경제적으로는 손해가 막심한 결정이었음에도, 막상 그 길 위에서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가고 나름의 풍경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수능을 조금 망쳤다고 해서 인생 전체에 큰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라는 위로와도 같습니다. 물론 목표했던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면 꿈꾸던 미래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멀어짐'이 곧 '불행'의 동의어는 아닙니다. 삶은 적자생존의 냉혹한 법칙으로만 설명될 수 없기에, 그저 남들보다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활기차게 생산적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삶이 아니니까. 무대공포증도 명성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실패나 절망도, 어차피 한 번인 삶의 일부다.
생산적으로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무대 공포증에 떨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절망하더라도 그 모든 순간은 단 한 번뿐인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무대 위에서 늘 주인공의 스포트라이트만을 기대하지만, 사실 삶의 더 많은 시간은 조명이 닿지 않는 무대 뒤편의 어둠 속에 머뭅니다. 여유가 없는 삶을 살다 보니 모든 시간이 가치 있고 쓸모 있기를 바라게 되지만, 정작 우리를 웃게 하고 숨 쉬게 했던 건 목적 없이 흘려보낸 비생산적인 시간들이었습니다. 비생산적인 시간이 없다면 생산적인 삶 또한 지속될 수 없을 겁니다.
나라는 사람이 회사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성장은 남김없이 다 누렸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 설령 직업을 찾을 수 없다 해도,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다고 해도 내가 찾아낸 나만의 성장, 나만의 기쁨은 영원히 내 것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조직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그곳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을 ‘과거의 유산’ 혹은 ‘지나간 매몰 비용’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 시간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성취와 성장을 남김없이 경험한 찬란한 정점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모두 누렸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미련 없이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물론 세상의 잣대는 냉혹할지도 모릅니다. 당장 손에 잡히는 직업이나 직함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사회가 정의하는 성공의 궤도에서 잠시 벗어나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그 소중한 시간을 ‘의미 없는 공백’이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얻은 게 결국 이것뿐이냐”는 무례한 질문이 날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사자가 그 시간을 통해 진정으로 충만했다면, 타인의 야박한 평가는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타인은 결코 나의 내밀한 감정이나 고뇌의 깊이, 그 과정에서 싹튼 가치관의 변화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단편적인 결과물만을 보고 나라는 존재의 전체를 판단하려 듭니다.
하지만 나의 모든 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타인의 시선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내가 정성을 다해 일구어낸 ‘나만의 성장’과 ‘나만의 기쁨’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휘발되지 않고 영원히 내면에 뿌리내립니다.
그러니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더욱 단단한 자신감을 가져도 좋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멈춰 서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스스로가 찾아낸 기쁨의 증거들이 내 안에 오롯이 남아 있다면 그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단편적인 판단에 휘둘리기보다, 내 삶의 모든 면을 고려하여 내린 스스로의 결정을 믿어주는 것. 그것이 과거를 존중하고 미래를 맞이하는 가장 존엄한 자세일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 존재의 핵심은 집안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먹고 자고 싸는 건 끊임없이 준비하고 뒤를 치워야 할걸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인간 존재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깊이 고찰해 보아도,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뜻밖에도 평범한 ‘가사(家事)’의 영역에 있습니다. 삶을 지속한다는 것은 곧 먹고, 자고, 배설하는 행위의 무한한 반복입니다. 이 지극히 본능적인 생존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성실한 준비와 끈기 있는 뒤처리를 필요로 합니다.
아무리 고결한 이상을 품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생존의 기초적인 생리 현상 앞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머물다 간 자리에 남겨진 흔적과 찌꺼기들, 그리고 그것을 깨끗이 치워내는 일상의 노동은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숙명과도 같습니다. 이 묵묵한 뒤처리를 매일 수행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삶의 가장 진실한 핵심에 닿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란 생각보다 그리 대단하거나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정직한 자각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높고 밖에서 수많은 이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는 인물일지라도, 자신의 거처로 돌아오는 순간 그는 그저 한 명의 생활인으로 돌아갑니다. 화려한 수식어를 떼어낸 채, 자신이 만든 어지러움을 스스로 정리하고 내일을 위해 정성을 들여 끼니를 준비해야 하는 소박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집안일은 우리에게 가장 낮은 곳에서 겸손을 가르쳐주는 수행과도 같습니다. 세상을 호령할 듯 당당하게 밖을 누비던 마음도, 집으로 돌아와 쌓인 설거지 더미 앞에 서는 순간 비로소 차분해집니다. 우리는 결국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성껏 보살피고 다듬는 일로부터 삶을 시작하는, 작지만 귀한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계를 위한 돈을 벌고, 사회적 소속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일이 주는 강력한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다. 인정 욕구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이건 일을 잘하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다. 일중독에 빠지는 주요 원인 중 하나 아닐까. 일중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이 갖고 있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살아간다. 일의 이러한 특성이 반드시 좋기만 한 걸까? 『월든』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노동하는 인간은 매일 진정한 본모습을 찾을 여유가 없다. 다른 사람들과 가장 인간다운 관계를 유지할 여력이 없다. 시장에서 그의 가치가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계가 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시간이 없다. 자신의 지식을 끊임없이 써먹어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무지를 기억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무지를 아는 것인데 말이다."
우리는 모두 '일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사는데요, 사실 이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일을 못 하는 사람은 조직의 눈총을 견뎌야 하고,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가 일에서 아무런 재미와 흥미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잘하기 위해 몰입하고, 어느 순간 일과 자아가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는 단계에 진입합니다. 능력을 인정받으며 고취된 자신감은 서서히 우리를 '자발적 일중독'의 길을 걷게 되죠.
물론 그 몰입의 동기가 순수한 책임감인 경우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일에 함몰되어 일상을 잃어가는 순간 우리는 '나'라는 존재의 본질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과연 지식을 쏟아내기만 하는 삶이 마냥 좋은 것일까. 소로의 말처럼, 인간의 성장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무지의 자각'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유능한 일꾼이 되기 위해 쉼 없이 기계처럼 돌아가는 루틴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빈틈을 들여다보고 성찰할 시간을 박탈당합니다.
일을 잘 해내어 얻는 자신감은 달콤하지만, 그 달콤함이 나의 모든 시간을 집어삼키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유능한 기계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사이, 정작 인간으로서 성장할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