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사는 인생 까짓 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나가는 승현의 마음은 환희로 가득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조직에서 해방이다.
퇴사를 선언한 지도 거의 3주가 되어서야, 승현은 마음 편히 퇴사할 수 있었다. 이번 조직도 결국,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이번만으로 이미 10번이 넘었다. 11번째이던가? 12번째이던가.
딱히 나쁜 곳 없는 직장이었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다닐 마음이 없었다.
"그래. 수고했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팀장이 유독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승현은 멋쩍게 웃으며 인사했다.
남은 팀원들은 딱히 별 생각이 없었다. 의례상 한 두 마디씩 한 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입사 한 지 한 달 만에 퇴사를 하다 보니, 딱히 친하지도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사무실로 나가며, 승현은 한숨을 쉬었다. 퇴사를 해서 기쁘기도 하지만, 자신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다.
왜, 나는 유독 조직생활이 맞지 않은 걸까. 조직생활이 맞는 사람이 몇 있겠냐만은, 유독 맞지 않는 사람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는 궁금했다. 왜 남들은 멀쩡히 잘 다니는 직장을 오래 다니지 못하는 걸까. 그저 묵묵히 버티고, 꾸준히 다니기만 하면 승현은 충분히 좋은 직장에서 경력을 쌓으며 다닐 수 있었다. 좋은 기회도 많았고, 정규직으로 다니며 미래가 보장된 곳도 있었다. 스펙도 남들보다 좋았고, 일머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며 사회성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객관적으로 봐도 꽤 뛰어난 편에 속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유별나게 조직생활에 염증을 빠르게 느끼는 편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왜, 이 일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하지?"
이왕 9 to 6로 일해야 하는 거, 열정적으로 업무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던 승현이었다. 하지만, 이직 횟수가 늘어나고 단편적인 경력이 쌓일수록 그는 점점 회의감이 들었다.
일을 잘해서 좋을게 무엇인가? 잘하면 잘하 수록 업무량과 책임감만 늘어났다. 인턴과 계약직일 때는 어차피 정규직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서 좋을게 무엇인가라는 생각만 들었다. 정규직일 때는 어차피 같은 월급을 받는데 더 열심히 해봤자 뭐가 좋을까.
승현은 어느 순간부터, 조직생활 자체에 회의감이 들었다.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서 조직의 성과를 달성한 들, 본인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미미했다. 팀장의 칭찬? 필요 없다. 승현에게는 인정욕구보다는 실질적인 보상이 중요했다. 직장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다녔던 승현에게는, 직장에서 하는 그 어떤 일도 공허함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끝내거나, 직장 동료들과 재밌게 술 한 잔을 해도 직장을 다니는 맛이 안 났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 그러고 사니까 승현도 그냥저냥 잘 다니고 있었다. 인생살이 그런 것이지, 직장이 원래 그렇지 하면서 말이다. 계약직으로 경력을 좀 더 쌓고 정규직으로 직장을 다니게 되면 자신의 이런 직장인사춘기는 끝이 날 것이다.
승현은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될 참이었다.
문제는 승현에게 좋아하는 일이 생기고, 꿈이 생기면 서였다.
"와,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일요일 저녁 9시. 승현은 깜짝 놀랐다. 주말이 사라져 있었다.
분명 금요일 퇴근하고 나서부터, 글을 쓰던 승현의 시간은 어느덧 일요일 저녁 9시가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였던가. 이렇게 주말에 계속해서 글을 썼던 것이.
일을 그만두고 중간중간 이직을 하기 전, 그는 항상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처음에는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썼다. 힘들었던 일, 괴로웠던 일, 즐거웠던 일들을 차근차근 떠올리며 쓰던 글을 통해 그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승현은 간간이 글을 쓰면서 삶을 헤쳐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썼다. 바쁜 와중에도 꼭 한 줄을 쓰던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느꼈다.
'내 감정, 생각, 느낌등을 글로 쓰면서 살아가고 싶다.'
느닷없이 찾아온 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꿈이란 게 없었던 승현은 처음에 사춘기가 늦게 찾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점점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그 마음이 커질수록 직장생활이 너무나 힘들었다.
주말이 끝나갈 때면,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꿈을 잠깐 접어두고, 다시 생계를 위해 일을 하러 가야 했다.
승현은 평일에도 꿈을 꾸고 싶었다. 직장에 있는 동안 그의 마음 한편은 꿈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전에는 집중해서 했고, 의심도 하지 않으며 앞만 달리던 그의 직장생활은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는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결국, 승현은 용기를 내야 했다. 어리석고 무모하지만, 퇴사를 결심했다.
남아있는 생활비, 현재 이뤄놓은 결과, 포트폴리오, 미래의 가능성 등등을 따졌을 때, 도박에 가까웠다.
승현도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호승심, 욕심, 무책임함, 부족한 인내심 등등이 발현된 '치기'인 것을.
그래서 더 말릴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바깥은 지옥이라고. 그 말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차가운 현실, 세상은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몰라서 꿈을 좇지 않는 것이 아니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순응한 대가는 달콤하다.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승현은 아직 누군가를 책임질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자신만을 책임지면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자신의 감정을 따라보기로 했다. 자신의 감정과 꿈을 무시하는 것만큼 스스로에게 가장 무책임한 것은 없었으므로.
그에겐 가장 차가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선택한 지옥이기에 한 걸음씩 인내하며 견뎌갈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어리석음을 비판할 것이다. 결과로 증명해내지 못하면 "그럴 줄 알았다"며 그의 모든 삶을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승현은 그런 게 무섭지 않았다. 제일 무서운 것은 본인이 본인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니까.
그는 마지막으로 건물을 되돌아보았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는 콘크리트 건물은 여전히 차가웠다. 마치, 그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너는 이제 세상의 온갖 세찬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살아갈 것이다."
"상관없다. 바람은 이미 불고 있었는데 뭘."
정면으로 부는 바람은 뒤돌면 순풍이 되는 법이다.
그는 차가운 건물을 등지고 햇빛 속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