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사태가 터져도 책은 읽어야겠어.
특별안전구역에서 비싼 값을 지불했지만, 커피의 맛은 썼다. 그제야, 민희는 커피 맛 자체보다 그 분위기를 더욱 좋아했음을 깨달았다. 불편한 좌석,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그녀가 좋아하는 카페가 아니었다.
그곳은 카페라기보다는 시장통에 가까웠다.
"아.. 도저히 못 읽겠네."
민희는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도저히 책을 읽을 맛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먹다 남은 케이크와 커피를 그대로 반납하려다가, 2만 5천 원이라는 가격이 아까워 테이크아웃하기로 했다.
"아, 벌써 가시게요? 아무래도 좀 시끄러웠나요?"
카페 주인이 여전히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민희는 그냥 멋쩍게 웃으며 카페를 나섰다.
카페는 원래 담소를 나누러 오는 공간이기에 시끄럽다고 불평할 수는 없었다.
조용한 공간을 원한다면 다른 장소로 옮기는 수밖에.
시간은 아직 오후 4시를 넘기지 않았다. 오후 5시는 돼야, 다 같이 통솔을 받으며 집으로 복귀할 수 있었기에 다시 시간을 때울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읽다 만 책이 손에 들려있는 걸 발견한 민희는 도서관을 가기로 결정했다.
다시 중앙 도로로 나온 민희는 표지판을 봤다.
특별 안전 구역의 여러 시설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놓은 표지판은 각종 오락 시설들을 적어놨다.
여러 시설들 중에 도서관이 있었다.
민희의 기억과 동일한 장소였다. 다른 오락시설들을 더 들일 판국에, 도서관이 남아 있는 것이 의아했다. 하지만, 민희는 곧 그 해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하게, 특별안전구역 안에 도서관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임이 컸다. 구역 밖에 도서관이 위치해 있었다면, 정부에서도 이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도서관이 운 좋게 그 위치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도서관 이용도 가능했음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민희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전자책으로 책을 읽는 것도 질렸기에, 종이책의 질감을 오랜만에 느끼고 싶었다. 온라인으로 책을 구매할 수는 있었지만, 성천시는 필수물품이 아니면 배송이 제한되었다. 민희 이게는 책이 필수물품이었지만, 일반적으로는 필수품으로 분류될 수는 없었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만이 필수품으로 분류되는 세상이었으니까.
"와, 이 길들은 진짜 평소보다 더 깨끗하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민희는 평소보다 훨씬 깨끗하게 정돈된 도로를 보며 감탄했다. 교차로는 항상 시끌벅적했고, 곳곳에 조그만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는 곳이었다.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야, 세상은 오히려 더 깨끗해졌다. 신호등 없이는 한 발짝도 들일 수 없는 이 넓은 교차로는 깨끗하면서도 기이했다. 그 세상을 홀로 고고히 걷는 기분은 섬뜩하면서도 아찔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자연히 아스팔트 위 하늘로 향했고, 그 아래의 산도 시야에 자리했다.
하늘과 산은 둘 다 이상하리만치 푸르렀다.
지금 걷는 땅이 아스팔트가 아니라 흙이었으면 더없이 완벽했겠지만, 민희는 잠깐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민희는 잠깐동안 고독을 즐긴 후, 도서관으로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 곳이 없었다. 좀비들도 책을 읽기는 싫었던 걸까? 아니면 원래 이용자가 적어서 그랬던 것일까. 책도 거의 훼손된 곳이 없어 보였던 민희는 신나서 문학 코너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800번대로 시작하는 이 장서들에 꽂힌 종이책들은 오래된 책 냄새를 풍겼다.
책 하나를 꺼내니, 가지런히 훼손된 듯한 책 커버와 누렇게 변질된 종이, 고풍스러운 먼지 냄새.
민희가 원했던 느낌이었다. 햇볕에 위치한 책장은 그 따스함속에서 정감 있게 낡아있었다.
다소 불편한 의자까지 놓여 있는 투박함도 사랑스러웠다. 기억 속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 의자 속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힘들고 외로울 때 간간이 찾았던 이 공간 속에서, 잠깐이나마 숨을 돌렸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다.
오랜만에 그 추억을 떠올린 민희는 의자에 앉았다. 아쉽게도 햇볕이 그녀를 비춰주진 않았지만, 충분했다.
이 아날로그적인 공간 속에서, 민희는 눈을 감고 잠시동안 세상과 단절된 휴식을 취했다.
부스럭.
갑작스럽게 들리는 인기척에, 민희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원하는 책이 여기 있어서요."
다소 어수룩해 보이는 남성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의 왼손에는 여러 책들이 쥐어져 있었다.
얇고 조그만 시집도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누가 봐도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민희는 꾸벅 인사했다. 생각해 보면 남자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먼저 사과를 하는 그의 모습이 예의 바르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도서관 의자에서 낮잠을 잔 자신이 더 잘못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남자는 원하는 책을 찾았는지, 잠깐 미소를 짓더니 옆 책장으로 넘어갔다.
원하는 책만 딱 찾고, 가져가는 모습이 재밌었다.
'아, 나도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책을 가져가야겠네.'
어느덧 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민희는 책장 구경을 하다가 하나씩 집어 들어 책을 보는 걸 좋아했기에, 1시간은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분주하게 책을 골랐다. 도서관 이용시간이 끝나갈 즈음에, 그녀는 읽을만한 책 4권을 챙길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사람들은 갈 때보다 좀 더 통제를 잘 따랐다.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도 먹고, 원하는 오락을 즐겨서인 걸까.
사람들은 즐거워했고, 이미 몇몇은 친해졌는지 시끌벅적했다.
지나치게 시끌벅적해지면, 군인들이 약간 눈치를 주긴 했지만 심하게 통제하진 않았다.
민희는 아까 자신에게 인사했던 남성과 책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재밌었던 추리 소설, 힐링 소설 등등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가 추천해 준 책 몇 권을 메모까지 한 그녀는 다음 외출 때도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기회가 된다면, 성천시에서 독서모임이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단순히 책 읽는 것을 넘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원래 이렇게까지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계속 갇혀 있다 보니 사람들과 대면해서 이야기가 나누고 싶어 졌다고.
민희도 그 말에 동의했다. 책 속의 대화가 아닌, 실제 사람들과의 대화가 필요했음을 그녀는 오늘 느꼈다. 좋아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면, 다음에 도서관에서 또 봬요."
"네, 다음에 봐요."
남자는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민희는 그다음 순찰구역에 집이 있었다.
이번 외출 덕분에, 민희는 숨이 트였다. 좋아하는 책도 빌렸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즐겁게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중에, 남자가 독서모임을 만들면 꼭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구나.'
연락처도, 이름도 교환하지 않은 민희는 내심 아쉬웠다. 책과 인터넷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직접적으로 맺는 관계도 무시 못하는 법이다.
다음 외출까지는 일주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 정도 시간이면, 지금 빌린 책들은 다 읽고도 남았다. 다음에는 더 많은 책을 빌려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녀는 책을 읽고, 빌릴만한 책을 찾았다.
저녁으로는 여전히 보급품으로 받은 참치, 김치를 넣은 참치김치찌개와 즉석밥을 먹었다.
야무지게 설거지까지 하고, 기분 좋게 책을 읽으려는 그때였다.
민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성천시 긴급 재난 문자 안내]
▲ 성천시 곳곳에서 대규모 좀비 이상 징후 발생.
▲ 외출 금지
▲ 별도의 안내가 있을 때까지 야외 활동을 철저히 금지
▲ 추후 보급 장소를 별도 공지할 예정이니 시민분들께서는 안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필, 이번 외출 이후로 이런 대규모 좀비 사태라니?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민희는 핸드폰을 켜 뉴스를 봤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외부 시민들의 댓글은 부정적이었다.
"이거, 사람들 대규모로 외출시키니까 좀비들이 굶주려서 이러네"
"아휴, 그러니까 왜 외출시키고 난리야? 이제 좀 진정되나 싶었더니만."
그들은 항상, 내부의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내뱉었다. 코로나 사태로 몇 달 동안 마음 놓고 외출하지 못한 적은 잊었는가. 민희는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자신도 그들과 같은 입장이라면, 비슷했을 테니.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다음 외출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희의 핸드폰으로 안전문자가 올라왔다.
[특별안전구역 폐쇄 안내]
▲ 대규모 좀비 사태로 다음 특별안전구역 외출은 연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정확한 원인 파악 후, 사태가 안정되면 추가로 공지드릴 예정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가혹했다.
민희는 핸드폰의 화면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내려놓았다.
아까 도서관에서 느꼈던 온기와, 종이냄새가 아직 그녀에게 남아 있었지만 곧 엹어질 것이었다.
바깥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 사태가 터졌을 때의 그 공포스러운 소리는 여전했다.
민희는 문을 다시 한번 잠그고, 창문까지 닫은 채 침대 속에 파고들었다.
'대체, 이 지옥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공포에 떨던 그녀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떠올랐다.
그녀가 힐링하고 싶어서 골랐던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
지금, 그 책이 너무나도 읽고 싶었다. 요란한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서, 그녀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여기저기 다시 총성이 울리고,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잔혹한 세상을 잊고 싶었다.
책상에 올려져 있던 책을 집어 들고 후다닥 침대 속으로 도망친 민희는, 책을 펼쳤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을 만큼 미미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훨씬 또렷했다.
총성이 울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그녀는 조용히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