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가 더 진짜 같은 이야기
우리는 한 번쯤, 위장신분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상상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지금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인생.
그 인생은 분명 지금의 내 삶보다 훨씬 재밌을 겁니다. 내 삶은 뻔하고, 재미없고, 지루한 법이니까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타인의 삶 체험'이라는 소재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이 욕망은 꽤 보편적인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소설 『젠틀맨』은 이 욕망을 꽤 구체적이고 문학적으로 상상한 작품입니다. 대한민국의 조폭이, 평범한 대학생이 되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 소설은 저에게 이렇게 묻는 듯했습니다.
들키지 않는 거짓된 삶이 오히려 충만하다면, 그 삶은 정말 '가짜'일까?
소설 속 주인공은 조폭입니다. 대중문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이미지 그대로입니다.
유흥업소를 관리하면서, 싸움을 잘하는 남자.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 제목처럼 여자들을 젠틀하게 대한다는 점?
어느 날, 그가 몸담은 조직이 살인 청부업자 단 한 사람에게 몰살을 당합니다. 그걸 계기로, 어느 대학의 학생증을 들고 있었던 그는 무작정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다행히, 너무나도 닮은 얼굴, 기존의 학생은 잠수까지 탔었기에 녹아드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크게 의심하지 않았거든요.
주인공은 그렇게, 피비린내 나던 조폭시절을 뒤로하고 풋풋한 대학생활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항상 위장신분이 들통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고, 원래의 학생증 주인공에 대한 불안도 내재해 있었죠. 그런데 웬 걸, 정작 위장신분이 들통난 것은 그의 친구였습니다. 게다가, 진짜 학생증의 주인은 조폭의 삶이 마음에 드는 듯, 이렇게 인생을 바꿔 살아가자고 제안합니다.
그 바뀐 인생 속에서, 주인공은 꽤나 '젠틀'하게 잘 살아가며 평범한 인생을 꾸려 나갑니다. 이 인생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군대도 한 번 더 갔다 오게 됩니다.(이건 진짜 마음에 든 겁니다.)
주인공은 그렇게, 새로운 인생 속에서 누구보다 젠틀한 남자로 살아갑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결국 누군가의 소중한 친구가 되고, 사랑을 약속하는 연인이 되는 ‘젠틀맨’이 됩니다. 반대로 진짜 학생증의 주인은 오히려, 주인공의 과거를 닮은 삶을 선택합니다. 두 사람의 삶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엇갈리게 됩니다.
만약 나의 정체가 끝내 들키지 않는다는 조건이 주어진다면, 정체성은 단순히 태어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기로 선택한 방향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환경과 본성 사이에서, 매 순간 스스로를 다시 정의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삶을 통째로 가져오는 행위가 가벼워질 수는 없습니다.
『젠틀맨』을 읽으며 계속해서 불편함을 느끼는 건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주인공의 선택이 매력적으로 보일수록, 우리는 동시에 그것의 위험성과 부당함을 인식하게 되거든요.
가짜임을 들킨 친구는 결국 불행 속에 허우적거리며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하지만, 들키지 않은 주인공은 계속해서 부당한 이득을 받으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는 극명히 드러납니다.
중년이 되어버린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게 학생증 카드를 제시합니다. 누가 봐도 나이가 들어버린 모습임에도, 그는 끝내 20년도 더 된 자신의 과거 '가짜' 신분증으로 '진짜'의 시스템을 통과하며 할인까지 받습니다.
어쩌면, '진짜'는 그저 들키지 않은 '가짜'일 수도 있다는 섬뜩함이 재밌었던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