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출근을 무사히 마친 민기에겐 큰 업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부서원들은 그가 '체험형 인턴'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한 듯했다. 옆자리에 앉은 김민영 과장은 바빠 보였지만 민기에게는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았다.
업무가 없을 때는 마음껏 공부를 해도 된다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바쁘게 업무 중인데 자신은 한가롭게 책을 펼쳐서 공부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눈치가 보인 민기는 동기들은 어떠고 있는지 궁금했다.
메신저를 켜고 단체 대화방에 들어간 민기는 채팅을 시작했다.
"혹시, 다들 바쁘신가요? 저만 일을 안 시키는 거 같아서.."
민기가 메시지 하자마자, 다른 몇몇 동기들이 바로 답장을 날렸다.
"저도 그래요 ㅠㅠ 지금 너무 눈치가 보여요."
"저는 그냥 사업설명서만 계속 읽고 있는데, 솔직히 뭔지 모르겠어서 그냥 가만히 있어요."
"공부해도 된다고 하는데, 눈치 보여서.."
다른 동기들도 민기와 마찬가지였다.
'다들 똑같구나.'
민기는 메신저를 하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그들의 답장을 읽은 뒤 "파이팅!" 한 마디만 적고 메신저를 숨겼다. 가방에는 자격증 책이 있었지만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눈치가 보이는 걸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던 민기는 결국, 점심을 먹고 나서 큰 용기를 냈다.
책상에 책을 바로 펼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할 바에는 공부라도 하는 게 나았다. 해도 된다고 했는데, 안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필통과 공학용 계산기까지 꺼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아무도 민기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한 30분 정도 지났을까, 민기의 사수가 와서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와, 어려워 보이네. 이거 무슨 자격증 시험이에요?"
"아, 이거 수질환경기사 시험입니다."
"오, 어려운 거 하시네. 파이팅!"
응원해 주는 사수 덕분에, 민기는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단 걸 느꼈다.
그 뒤로는 그냥 책을 펼쳐놓고 마음껏 공부하기 시작했다.
셋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민기는 출근하자마자 책부터 펴고 공부를 했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간단한 일이 주어질 때마다 바로 해치우는 민기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인사할 뿐이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원래 인턴이 이런 것일까.'
근무 시간에 공부도 하면서 돈도 받고 경력도 쌓을 수 있다니.
공부할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좋았지만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분명히 일을 아예 안 시키진 않을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렇게 내버려두는 걸까.
금요일이 되자, 사수가 다가와서 말했다.
"다음 주부터는 조금씩 제가 해야 할 업무를 드릴게요. 아마 대리님이랑 과장님도 이것저것 부탁할 텐데, 저희가 잘 조정해 가면서 도움 요청할게요."
"넵! 알겠습니다."
첫 주라고 그동안 봐주신 거였구나.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할 느낌이었다.
민기는 긴장되었지만 한편으론 드디어 일을 하게 되어 기뻤다.
"그나저나, 오늘 인턴들끼리 술 먹으러 간다면서요?"
"헉, 어떻게 아셨나요?"
"아, 이미 회사에 여기저기 소문났던데요?"
민기는 회식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었다. 동기들이 말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층도 다른데 사수가 알고 있을 정도로 소문이 퍼지다니.
'그래도, 어차피 나쁜 소문도 아닌데 뭘.'
사수는 이것저것 물어봤다. 자기가 맛있는 곳이 어딘지 알고 있는데, 한 번 추천해 주겠다며 말이다.
"저쪽 역 근처에 닭갈비집 가기로 했어요."
"어, 거기 맛있는데! 잘 골랐네. 누가 골랐어요?"
"하하, 다른 동기가 골라줬습니다."
"아, 부럽다. 나도 동기들끼리 술 먹을 때가 좋았는데."
사수는 잠깐 추억에 잠기다가, 갑자기 줄게 있다며 허겁지겁 자신의 자리로 갔다.
민기가 의아해하며 쳐다보고 있자, 사수는 조그만 봉지 같은 약을 가지고 왔다.
자세히 보니 숙취해소제였다.
"저도 술을 워낙 좋아해서 이런 거 챙기고 다니거든요. 민기씨 술 건강하게 마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환처럼 물로 넘기는 숙취해소제는 민기가 즐겨 먹던 것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역시 통하는 게 있다.
금요일 오후는 뭔가 다들 여유로웠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원들도 뭔가 나른해 보였고 이미 짬이 찬 과장이나 부서장들은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바쁜 분위기에 눈치가 많이 보였는데, 금요일은 정말 달랐다.
민기의 팀은 아무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혼자 멀뚱하게 앉아있던 민기는 혹시 모를 전화를 대비해서 자리를 지켜야 하나 싶었다. 그러다, 그냥 자리를 비워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 옥상에 간 민기는 거기서 김인호 대리와 이한수 사원을 만났다.
두 사람은 멋쩍게 웃으며 민기에게 말했다.
"아유, 금요일인데 그냥 편하게 쉬어요. 팀장님이랑 과장님도 아마 카페에 있을 걸요? 가서 음료라도 하나 얻어먹으면 되겠네."
그 말대로였다. 이미란 팀장과 김민영 과장은 사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민기는 딱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금요일은 원래 이런 분위기인 걸까.
목요일까지 바쁘던 사무실이 금요일에 갑자기 여유로워지는 것이 신기했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는 걸까. 아니면, 다들 일을 다음 주로 미루는 걸까?
오후부터 여유로웠던 사람들은 저녁 6시가 되자 다들 칼같이 일어났다.
원래는 민기 같은 인턴이나 아르바이트생만 일어나던 사무실이었지만, 정규직들도 다 같이 일어나는 모습이 신기했다. 민기의 팀도 마찬가지였다. 팀장님부터 이한수 사원까지 모두들 5시 50분부터 슬금슬금 짐을 싸더니 6시가 되자마자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민기 씨. 오늘 술 먹는다면서요? 조심히 드시고 다음 주에 봬요."
김인호 대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저도 술 먹으러 가야 해서 이만. 민기 씨 너무 많이 드시지 말고 다음 주에 봐요."
이한수 사원도 마찬가지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민기도 자리에서 나가려던 참에, 팀장이 말을 건넸다.
"오, 술 드시러 가시는군요? 좋을 때네요."
민영 과장도 그제야 말을 걸었다.
"동기들이랑 드시는 거죠? 와 진짜 맛있겠다."
'회식을 하는 게 이렇게 큰 일인가?'
민기는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져줄 일인가 싶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고 오겠습니다."
인사를 한 민기가 뒤돌아 나가는 모습을 보며, 팀장이 말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말이죠."
"아유 팀장님. 20년은 더 거슬러 가야 하지 않아요?"
"아이, 그 정도는 아니야."
민기는 피식 웃으며 건물 밖을 나섰다.
금요일 퇴근 공기는 생각보다 더 달콤했다.
건물 밖에는 이미 동기들이 모여서 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기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동기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동기가 민기를 보며 말했다.
"아, 퇴근 눈치를 좀 본다고 늦었어요. 6시 되자마자 일어나는 게 은근 눈치 보이더라고요."
"에이, 저희 인턴인데 그런 거 눈치 안 봐도 되잖아요~ 빨리 술 먹으러 가요."
민기를 포함한 총 6명의 동기들은 바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꽤 많은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다들 표정이 밝아보였고, 통화를 하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따라 유독 길거리의 네온사인이 현란하게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평소보다 북적거리는 거리를 통과하여, 골목길로 들어서자 닭갈비 집이 눈에 보였다.
군침 도는 냄새가 벌써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헉,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죠?"
"와, 예약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닭갈비집 안은 이미 북적북적했다. 연령대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대학생들 무리부터 나이 든 중년 무리들까지. 이미 소주를 5병 이상 까놓은 사람들도 보였다.
'와, 저분들은 언제부터 드신 거지?'
민기가 식당을 구경하는 동안, 예약을 했던 동기가 식당 종업원에게 말했다.
"저희, 6명 예약했었는데 어디 앉으면 될까요?"
"아, 6시 30분에 예약하셨던 손님이시죠? 이쪽으로 오세요. 예약석이 따로 있어요."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들어서자, 안쪽에는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방문을 여닫는 단체룸이었다. 안에는 여러 밑반찬과 수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와, 좋은데요?"
"그렇죠? 여기가 맛집이래요."
짐을 제일 먼저 정리한 동기가 능숙하게 테이블에 있는 콜 버튼을 눌렀다.
"사장님. 저희 양념이랑 소금 닭갈비 각각 3인분씩 먼저 주시고요, 소주랑 맥주 각각 2병씩 주세요."
"소주랑 맥주는 뭐뭐 드릴까? 그냥 적당히 드려요?"
"네, 아무거나 주세요. 잔은 각각 6개씩 주세요."
술은 주문하자마자 바로 나왔다.
다른 동기 한 명이 능숙하게 소주 1병과 맥주 1병을 낚아채더니 말했다.
"제가 소맥을 기가 막히게 타는데, 먼저 드셔보실 분?"
"헉? 저요!! 제가 소맥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저는 일단 소주부터 가볍게 마실게요."
"소주가 가벼워요..?"
술이 나오자마자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동기들이 서로 떠들며 시끌벅적 얘기하기 시작했다.
민기는 잠자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때, 다른 동기가 민기에게 조심히 물었다.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아, 저는 INTP입니다."
"오, INTP~ 완전 집돌이겠다."
MBTI를 잘 믿진 않지만, 집돌이인 건 사실이었다. 민기는 멋쩍게 대답했다.
"뭐.. 맞는 말이네요."
"저는 뭘로 보여요."
민기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아직 말도 몇 마디 안 나눠봤는데, 어떻게 맞추는 거지? 그냥 이미지만 보고 맞추는 건가? 민기가 주춤하는 사이, 다른 동기가 말했다.
"제가 맞춰볼게요! ESTP?"
"헐~ 제가 계획 같은 거 안 세울 것처럼 보여요??"
"어, 뭔가 그럴 거 같아요!"
"어떻게 아셨지? 얼굴에 티나요?"
"네! 완전!"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크게 웃었다. 민기는 신기했다. 그동안 사람들이랑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일까? MBTI 하나로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갈 수 있구나. 그는 J처럼 보인다, P처럼 보인다는 말부터 해서 T 같아요? 등등 대화 맥락을 따라잡기가 힘들어서 가만히 웃고만 있었다.
멋쩍게 술잔만 만지작 거리자, 제일 어린 동기가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 외쳤다.
"헐, 저희 짠도 안 하고 있었네요? 아직 닭갈비도 안 나오긴 했는데 가볍게 한 잔 할까요?"
"네~ 쨘!"
"짠~"
"짠!"
소맥 잔과 소주잔이 서로 맞부디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소주잔을 들은 민기는 한 잔을 전부 다 마셨다. 오늘따라 술이 조금 썼던 민기는 바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와~ 소맥 진짜 기가 막히는데요? 대학 때 소맥 좀 마셨죠?"
"저만의 황금레시피가 따로 있거든요."
"헐, 저도 알려주시면 안 돼요?"
"에이, 이거 그냥은 못 알려드리죠."
민기도 사실 소맥을 더 좋아하긴 했다. 하지만, 뭔가 말을 꺼내기 어려워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다른 동기가 민기에게 물었다.
"민기쌤도 소맥 드시고 싶은 거 같은데요? 그쵸?"
"아.. 맞아요. 혹시 저도 좀.."
"진작에 말하시지! 제가 바로 타 드릴게요~ 좀 세게 타드려요?"
민기는 술을 그렇게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센 척을 하고 싶었다.
남자는 본인 혼자만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이상하게 허세를 부리고 싶었던 민기는 한 마디 툭 던졌다.
"네. 좀 세게 해 주세요."
"오~ 민기쌤 술 잘 드시나 보다."
민기의 말에 소맥을 제조하던 동기는 소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우고, 맥주를 조금만 따랐다.
맥주 컵의 2/3 정도만 차오른 소맥은 색이 옅었다. 딱 봐도 세 보이는 술이었다.
민기가 소맥을 받아 들자 닭갈비가 나왔다.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러운 닭갈비가 접시 가득 담겨 있었다.
"자, 닭갈비 나왔습니다~ 조심히 구워드세요."
"와, 맛있겠다!!"
"막내인 제가 구울게요!
"어, 아뇨 제가 굽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사실 잘 구워요."
마지못해 집게를 넘겨준 민기는 머쓱해서 소맥을 살짝 홀짝였다.
맥주 맛은 흐릿하고 소주의 쓴 맛이 강하게 올라오는 소맥이었다. 아, 괜히 센 척을 했나.
절로 표정이 찌푸려졌다.
"민기쌤. 쓰죠? 맥주 좀 더 타요."
"하하, 네. 그럴게요."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니었다. 이런 소맥을 마시다가는 금세 취하고 다음 날 숙취로 고생할게 뻔하다.
닭갈비가 구워지는 동안 민기를 포함한 동기들은 꽤나 건설적인 이야기를 했다. 무슨 업무를 하는지, 이전에 경력이 있는지, 어느 학과를 나오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등등. 조금은 삭막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이야기들이었다. 다들 이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초반에는 방황할 수밖에 없는 거구나. 민기는 술을 홀짝이며 생각했다.
하지만, 닭갈비가 다 구워지고 술이 더 들어가면서부터 이야기는 달라졌다. 레퍼토리는 꽤나 다양했다. 앞으로 뭐 해 먹고살아야 할지, 불안한 진로, 남자친구와의 이야기, 직장 상사들한테 들었던 재밌는 썰, 이전 직장 이야기 등등.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질 때마다 술도 함께했다.
인당 소주 1병, 맥주 1병 정도는 마셨을까. 그보다 좀 더 많이 마신 민기는 슬슬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술이 약한 동기는 이미 고개를 숙여 거의 잠을 자고 있었다.
"어.. 저희 닭갈비도 거의 다 먹어가는데 여기서 1차 마무리할까요? 2차 가실 분 있으세요?"
제일 어린 동기는 아직 쌩쌩해 보였다.
"저는 조금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저도 이 분 챙겨서 들어갈게요."
"전 남자친구랑 이따 좀 보기로 해서.."
민기는 깜짝 놀랐다. 무조건 2차를 갈 것 같았던 분위기였는데, 다들 이렇게 거절할 줄이야.
이미 잠에 든 동기는 챙겨서 보내야 했고, 나머지 세 명은 각자 들어간다 했으니 사실상 민기만 남은 셈이었다.
'당연히 이건 파토난거겠지.'
술이 아직 더 먹고 싶었던 민기는 아쉬웠다. 오늘따라 술이 더 먹고 싶었던 민기는 집 가서 혼술이라도 할 셈이었다.
그때, 동기가 말했다.
"민기쌤. 괜찮으시면 단 둘이라도 술 마시러 가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