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인간을 어떻게 메마르게 하는가?
얼마 전,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와서 자연스럽게 작가님의 소설에 관심이 갔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전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기에 노벨문학상 소식이 없었다면 평생 읽지 않았을 소설일지도 모릅니다.
<채식주의자>를 읽게 된 계기는 그저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님의 작품이 궁금해서였을 뿐입니다.
이제 와서야 작기님의 작품을 칭송하기엔 타이밍이 너무 이상하니, 그저 덤덤하게 읽은 소감을 밝히고자 합니다.
<채식주의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중심적인 메시지는 아무리 봐도 "폭력"에 대한 내용입니다. 신체적/정신적 폭력에 노출된 사람의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은 독자에게 하여금 폭력에 대한 생각을 재고하게 합니다.
소설 속에서 폭력이라는 메시지가 어떻게 다뤄지는지 지금부터 리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에 대한 강력 스포가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소설은 크게 3부로 나뉩니다.
1부 타이틀은 채식주의자로 "영혜"의 남편 시점에서 내용이 전개됩니다.
평범한 가정. 아내인 영혜가 갑자기 이상한 꿈을 꾸면서 육류를 끊고 채식주의자가 됩니다.
우유까지 끊은 영혜의 이상행동에 남편은 낭패를 겪습니다.
영혜의 기이한 행동에 가족들은 약간의 폭력을 쓰면서까지 그녀를 바꾸려 하고, 그녀는 거의 발작에 가까운 반항을 합니다.
결국, 가족들은 그녀를 정신병동에 넣으며 1부는 끝이 납니다.
2부는 영혜의 형부시점에서 내용이 전개됩니다. 비디오아티스트인 형부는 우연찮게 아들의 몽고반점을 보게 되면서 영혜를 욕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영혜를 불러 비디오를 찍으면서 그녀와 동침을 하게 되는데, 그 동침을 영혜의 언니이자, 형부의 남편인 "인혜"에게 들키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3부는 이제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정신병원에 방문하여 영혜를 살펴보는 인혜는 영혜를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점에서 서술합니다.
영혜가 서서히 메말라가는 과정이 잔혹하면서도 무덤덤하게 서술되며, 소설이 끝이 납니다.
소설이 특이한 점은, 중심인물인 "영혜" 본인의 시점에서 속마음이 전개되지 않고 주변 인물인 남편, 형부, 언니의 시점에서 각각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서, 폭력에 노출된 인간의 변화와 묘사가 각기 다른 인물을 통해 관찰됨으로써, 좀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네요.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가부장제로 인한 억압과 그에 대한 반항이라는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영혜"라는 인물이 폭력이 가득한 꿈을 꾸고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주의자로 전환하게 되면서 그녀는 폭력에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기를 먹으며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채식주의는 통념을 벗어난 이상행동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사회의 관습을 따르지 않으면 이상하게 보는 것처럼, 영혜는 채식주의로 전환하게 되면서 갖은 폭력에 노출됩니다.
그중에서,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하는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입니다.
팔을 붙들게 하여, 그녀의 입에 억지로 고기를 넣는 행위는 엄연한 폭력행위입니다. 뺨까지 때린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영혜는 그런 아버지에게 물리적으로 이길 수는 없기에 본인을 자해하면서 반항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이런 영혜의 모습이 가부장제에 대한 반항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무력으로 이길 수 없는 강대국에게 반항하기 위해 비폭력운동을 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2부로 들어서면서 '영혜라는 인물이 노출된 폭력적 상황은 정말로 가부장제에 대해서만 국한된 내용일 뿐일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가 너무 협소하게 해석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부장제를 떠나서, 사회의 전반적인 폭력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세속적인 통념, 관습을 벗어난 인물에게 사회가 행하는 폭력의 무서움을 말하는 느낌이었거든요.
2부에 등장하는 비디오아티스트인 영혜의 형부는 꽤나 난해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형부는 줄거리에서 말했듯, 몽고반점이 계기가 되어 영혜를 욕망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어떤 이미지에 사로잡혀 그 이미지를 실현시키고 싶어 하는 형부는, 알록달록한 물감으로 칠해진 남녀의 모습 속에서 좀 더 은밀하고 매혹적인 무언가를 욕망하게 된 인물입니다.
저는 영혜와 형부 둘 다 어떤 이미지에 사로잡혀 통속적인 사회 관습을 벗어나게 된 인물들로 느껴졌습니다.
여기서 영혜는 채식주의를, 형부는 자신의 아내가 아닌 처제를 욕망하게 되면서 관습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지독한 폭력을 당하게 됩니다.
형부는 좀 자업자득이긴 하지만요.
어쨌든, 저는 처음에는 형부가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한 영혜를 상대로 무언의 폭력을 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혜가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형부가 만만하게 보고 접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소설 속에서 형부는 충분히 영혜의 의사를 물어봤고 영혜도 그렇게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영혜는 형부가 자신의 몸에 물감을 칠한 것처럼, 형부 자신도 물감을 칠하는 것만으로 형부를 받아들였거든요. 영혜가 공포에 떨어하는 모습도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영혜가 바란 것은, 자신과 비슷한 색감과 냄새를 가진 사람을 바란 것처럼 보였습니다.
형부는 그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그녀를 이용했을 뿐이었습니다.
영혜를 욕망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욕망의 시발점은 자신이 꿈꿔오던 어떤 이미지의 실현이었습니다.
이들은 그저,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할 욕망(형부)과 관념(채식주의)을 가지게 된 인물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속적인 관습에서 벗어난 영혜는 단지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던 것일까요?
자신과 비슷한 폭력적 환경에 노출된 인간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걸까요? 형부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영혜는 그저 폭력적인 환경에서 무기력함을 학습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보였던 영혜는, 형부와 동침을 한 사실을 언니에게 들켜 정신병원에 입원당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인혜가 형부의 뺨을 내려치거나 자신의 동생인 영혜의 머리칼을 쥐어 잡지 않고 정신병원에 바로 입원시켜 버리는 모습이 더욱 폭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형부와 영혜의 동침은 인혜에게 있어서 정말 무자비한 폭력이자, 해서는 안 될 짓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구급대에 불러서 그 둘을 정신병원에 가둬버린 행위도 정말로 정당한 걸까요?
이런 상황의 후속조치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은 분명 일반적인 조치는 아닙니다.
아무리 영혜가 좀 이상하고, 형부가 난해한 정신세계를 가진 아티스트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인혜의 행동은 심정은 분명 이해가지만, 아버지가 영혜에게 한 행위만큼이나 폭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폭력을 당한 영혜는 정신병원에서 점점 미쳐갑니다.
그렇게 미쳐가는 과정이 3부에서 "인혜"의 시점으로 내용이 전개됩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를 찾아가는 인혜는 영혜의 이상행동을 목격합니다. 나무를 좋아하고, 나무가 되려고 하는 영혜는 물구나무를 서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고."
저는 이 대화가 영혜의 고통을 묘사한 장면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저 서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받치고 있다는 것은 버티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땅을 밟고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짚이지 않는 허공인 하늘에 발을 뻗은 채 땅을 받치고 있는 모습.
삶이라는 무대에서, 폭력을 당한 영혜에게 인생은 그저 두 팔로 땅을 버틸 수밖에 없는 잔혹한 현장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대화가 흐르고 난 뒤, 인혜의 속마음이 서술됩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다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 뿐이었다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그날의 가족모임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기 전에 그녀가 더 세게 팔을 붙잡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녀 또한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하고, 그 비겁함의 희생양으로 영혜가 희생되었음을 어렴풋이 인지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영혜는 왜 하필 나무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요?
나무는 대지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울창한 잎을 뽐내며 살아가는 고고한 존재가 아니라, 어쩌면 속에서부터 썩어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를 뜻해서 그런 것일까요?
대지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것은 어쩌면 속부터 썩어가고 있는 영혜의 모습이 아닐까요?
단단하게 속이 썩어버린 영혜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그녀의 내면에 잠식된 폭력은 이미 그녀를 서서히 메마르게 했는 건지도 모릅니다.
나무가 울창한 잎을 잃고 메말라가는 것이 겉에 보일 때면 거의 죽음이 다가왔을 때겠죠.
그 시점이 영혜에게 있어서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일 겁니다.
본격적으로 나무가 되려 하면서 메말라갔던 때였으니까요.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몸무게가 점점 줄어들고 살집이 빠져가는 그녀의 모습은 서서히 죽어가는 나무와 비슷합니다. 뿌리에서부터 양분을 얻지 못하면 결국 메말라죽어버리는 나무처럼, 유년시절에 아름다운 추억과 감정 대신 폭력이라는 불순물을 섭취한 영혜가 메말라버리는 것은 당연한 서순일지도 모릅니다.
영혜가 나무가 되고 싶어 한 모습은 폭력에 노출된 한 인격이 건강하게 뿌리를 박은 듯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메말라 죽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 아니었나 싶네요.
폭력에 노출된 인간의 메말라가는 과정을 묘사한 이 소설은 꽤나 잔혹했습니다.
폭력을 다룬 소설이기에 당연할 수밖에 없는 잔혹함이겠지만요.
가해자는 자신이 행한 폭력을 기억하지 못하고, 피해자는 그 폭력에 평생을 괴로워한다는 게 딱 떠오른 소설이었습니다.
영혜가 갑작스레 꿈을 꾸게 되면서 점점 메말라가는 나무가 되는 과정의 시작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노출된 폭력에서 시작된 거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 폭력이 잘못되었음을 영혜의 아버지는 분명 인식하지 못했을 겁니다. 인혜가 자신의 남편이 아닌 친동생인 영혜도 치료가 필요하다고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것도 분명 잘못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폭력을 당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합니다.
편의점 직원이나 콜센터 직원분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도 많지만, 반대로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런 작은 폭력부터,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들까지 인간은 무수한 폭력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 폭력에 잠식되어 버리면, 울창한 잎을 뽐낼 수도 있는 나무마저도 메말라버린 채 썩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양분을 얻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주요 에너지를 공급받을 땅.
그 땅을 토대로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반대로 땅이라는 삶을 그저 버텨내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하늘이라는 밟히지 않는 공간을 허우적댈 수밖에 없는 삶.
뿌리는 대지에 내리고 잎은 하늘을 향해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어버린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나무가 삶이라는 대지에서 뽑혀버린 채 죽음에 노출되어 버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아니라 버텨갈 수밖에 없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이, 폭력이라는 행위가 한 인간에게 미치는 잔혹한 고통을 묘사한 소설이라고 느꼈습니다. 그 폭력을 가부장제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약자나 소수에 대한 폭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큰 틀에선 모두 폭력이라는 범위에서 묶인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은 한 인격의 삶을 잔혹하게 망쳐버리는 파괴적인 행위이다."
살아가면서 사소한 폭력이라도 행하지 않을 수 있도록, 더 친절하고 세심하게 살 수 있도록 반성과 다짐을 해야겠습니다.
이상으로 <채식주의자> 리뷰를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