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구조를 묻다. 11장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한국 경제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는 마치 거대한 나무와 그 뿌리에 붙은 버섯 같다. 중소기업은 독립적으로 성장하기보다 대기업이라는 몸통에 기대어 살아간다. 이는 단순한 시장 현상이 아니라, 한국 산업 발전 과정 전체가 빚어낸 구조적 결과물이다.
해방 직후 한국에는 자생적 자본이 거의 없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기업과 금융, 토지 대부분이 일본 자본에 장악되었고, 해방 이후 이들 자산은 일부 집단에 불하되었다. 경쟁보다는 권력과 제도에 접근하는 능력이 성공의 열쇠가 되었고, 협력사들은 독립적 기반을 쌓을 기회를 놓쳤다.
1960~70년대 정부는 수출 드라이브와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며 대기업을 선택해 키웠다. 자본과 금융을 통제하며 전략 산업을 맡긴 결과, 중소기업은 독립 기업이 아니라 원청사의 하청에 머물렀다.
내수 기반은 약했고, 수출은 생존을 좌우했다. 환율이 경제 성패를 가르는 시대였다. IMF 외환위기 때 대기업은 살아남았지만 중소기업과 국민은 고통을 떠안았다. 이 경험은 대기업과 정부의 동맹을 더욱 강화시켰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위계적·권위주의적 문화가 겹쳐 구조는 더욱 고착되었다. 협력사들은 독립적으로 모험하기보다 원청과의 관계 유지에 집중했고, 은퇴 임원이 협력사 대표로 내려가는 관행은 종속 구조를 상징하는 풍경이 되었다.
삼성전자는 언론 보도 기준으로 1차 협력사가 약 700곳에 이른다. 현대차와 기아가 밝힌 바에 따르면 1차 협력사 237곳의 2023년 합산 매출은 90조 2,970억 원에 달한다. 조선업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2024년 말 기준 HD현대중공업은 1차 하도급 업체만 2,420곳, 삼성중공업은 1,430곳을 두고 있다.
겉으로 보면 협력사의 수와 매출은 방대하다. 하지만 발주가 줄거나 거래선이 바뀌면 협력사의 존립은 곧바로 흔들린다.
전기차 전환 과정에서 내연기관 부품 협력사들이 기술 투자 부담에 시달리고, 조선업 하청업체들은 불황기에 대량 해고와 임금 체불 문제를 겪었다. 숫자는 크지만, 개별 협력사의 생존 기반은 취약하다.
대기업은 필요할 때 직원을 분사시키거나 퇴직 임원을 협력사 대표로 앉히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창업과 독립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대기업의 비용 절감과 리스크 전가 수단이다. 협력사는 자율적으로 전략을 세우기보다 원청의 입장을 따르게 되고, 혁신 동기는 줄어든다. 결국 상생이 아니라 종속을 강화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사업부 분사와 사내벤처 독립은 흔하다. 그러나 이들은 독립적 경영권과 시장을 갖고, 외부 투자와 자율성을 보장받는다.
일본은 계열사망을 통해 장기 안정성을 추구했다. 하청 구조 문제는 있었지만, 일부 기업은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독립 경쟁력을 유지했다.
독일은 정부와 금융이 강소기업을 뒷받침하며 독자 브랜드를 키웠다. 수많은 히든 챔피언이 태어나 세계 시장에서 틈새를 장악했다. 은퇴 임원이 협력사 대표로 내려가는 문화는 거의 없다.
한국의 구조는 특수하다.
정부주도 성장과 재벌 구조, 위계적 문화가 맞물리며 겉은 분산된 듯 보이지만 속은 집중된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협력사들은 원자재와 인건비가 오르더라도 납품 단가가 깎이는 압박에 시달린다.
독자 기술이 원청사에 흡수되거나 다른 협력사로 이전되는 기술 종속 문제도 심각하다.
매출 대부분을 특정 대기업에 묶는 구조적 의존성, 단가 인하와 투자 부담이 겹쳐 재무 건전성이 약해지는 문제, 그리고 우수 인재를 확보하지 못해 혁신이 더뎌지는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포스코는 2004년 국내 최초로 성과공유제를 도입해 협력사의 혁신 성과를 함께 나눴다. 현대차는 전기차 전환 과정에서 일부 협력사와 공동 연구개발을 추진하며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5년부터 스마트공장 지원 사업을 시작해 거래선이 없는 중소기업에도 디지털 전환을 도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독자 브랜드다. 오스템임플란트, 씨젠, YG-1 같은 기업들은 대기업 종속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자기 이름으로 인정받으며 한국형 히든 챔피언으로 자리 잡았다.
AI는 산업의 속도를 가속화시키고, 전 세계의 경쟁 구도를 재편하고 있다. 대기업은 방대한 데이터와 자본을 활용해 빠르게 AI를 도입할 수 있지만, 협력사들은 투자 여력과 인력이 부족하다. 이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질 것이다.
만약 협력사들이 자율적 혁신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AI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를 더욱 벌리고 종속 구조를 굳히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반대로 정부가 제도와 인프라를 개방하고, 중소기업이 AI를 쉽게 도입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면,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AI는 위기이자 기회인 셈이다.
AI 시대의 희망은 청년에게 있다.
그러나 청년이 중소기업에서 도전하려면 소유주들의 인식부터 달라져야 한다.
중소기업 소유주들은 해외의 선진 사례를 적극적으로 배우고,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경영 철학과 시장 전략까지 체험해야 한다. 독일 히든 챔피언이나 북유럽 혁신 기업,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처럼 자기 브랜드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모델을 직접 보고 느껴야 한다.
정부와 협회가 청년 인재와 함께 이런 해외 스터디와 견학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한다면 효과는 훨씬 커질 것이다.
또한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가족 경영이나 창업자 개인 의사에만 의존하는 구조로는 AI 시대의 도전에 대응할 수 없다. 데이터 기반 경영, 글로벌 마케팅, ESG 같은 새로운 역량을 갖춘 전문경영인을 영입할 때 청년 인재들도 미래를 보고 도전할 수 있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면 투명성이 높아지고, 외부 투자 유치도 쉬워진다.
청년들은 이미 글로벌 플랫폼과 디지털 도구에 익숙하다. 이들의 아이디어를 존중하고 실행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사내벤처나 오픈이노베이션 같은 새로운 실험들이 활발해질 수 있다. 청년의 열정이 곧 기업의 혁신 동력이 되는 것이다.
한국 중소기업이 진정한 히든 챔피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하청 구조를 벗어나야 한다. 독자 브랜드를 키우고, 세계 시장에서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는 이를 위한 제도적 토대를 만들고, 중소기업 소유주들은 해외에서 배우고 전문경영인을 받아들이며, 청년 인재는 그 속에서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한국 경제는 대기업 중심 구조의 그늘을 넘어, AI 시대에 청년이 주도하는 새로운 히든 챔피언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