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세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
내가 최근에 떠올린 철학적 사유는 이렇다.
처음에는 현실 세계를 우리 뇌가 ‘벡터 전환’을 통해 가상 세계로 바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들었다.
즉, 현실 세계의 본래 모습은 사실 수치적이고 가상적인 세계이며, 우리가 ‘빨강·파랑·녹색’이라고 부르는 색조차 현실 세계의 본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체는 진화 과정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해 원추세포 같은 감각 기관을 발달시켰다.
이 원추세포는 인위적으로 빛의 파장을 우리가 보는 컬러 색으로 바꾸는 전환 작업을 하는 세포다.
< 원추세포 : Cone cell )
그 결과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경험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현실은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명체의 이익을 위해 구성된 ‘허상(illusion)’일 수 있다.
자연 그 자체에는 ‘빨강’이나 ‘파랑’ 같은 색깔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일정한 파장의 빛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소리라는 것도 공기의 압력이 주기적으로 변하는 파동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파장을 음악, 말소리, 새소리라는 감각적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즉, 우리가 느끼는 세계는 물리적 수치의 직접적 경험이 아니라, 뇌가 변환한 또 다른 형태의 현실이다.
인간의 눈에는 세 가지 종류의 원추세포가 있다. 빨강, 초록, 파랑에 민감한 세포들인데, 이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색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진화의 산물일 뿐이다. 열매의 익음, 독초의 구분, 짝짓기에 유리한 시각 정보 등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만 감각이 발달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상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인터페이스’다.
다른 생물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본다. 벌은 자외선을 보고, 뱀은 적외선을 감지한다.
새들은 네 가지 원추세포로 인간이 볼 수 없는 색을 본다. 개와 고양이는 색을 단순하게 보는 대신 뛰어난 후각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즉, 종마다 각기 다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현실도 자연의 본질이 아니라, 뇌가 진화의 과정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결과물이다.
TV 화면이 전기 신호로 RGB 필터를 통하여 무수한 색을 재현하는 것처럼, 우리의 뇌는 빛과 소리, 압력과 같은 물리적 데이터를 재구성해 ‘진짜 같은 현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세계의 모사이자, 생존을 위한 편집된 가상에 불과하다.
불교 금강경에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는 구절이 있다. 불교가 말한 허망은 단순한 덧없음이 아니라, 실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구성된 환상(illusion)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벡터로 전환하여 연산하는 과정도 결국 원래 있었던 현실 세계의 수치를 1,0으로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전기적 신호(빛)의 신호가 있으면 1, 없으면 0으로 원래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런 사유는 인류 역사 속에서 여러 번 제기되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우리가 보는 세계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칸트는 우리가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상’ 일뿐이고, 사물의 본질(noumenon)은 알 수 없다고 했다.
현대의 인지과학자 도널드 호프만은 “우리가 보는 현실은 진실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인터페이스”라고 주장했다.
물리학자 존 휠러는 ‘It from Bit’라는 개념을 통해 우주가 정보 비트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현실은 본질적으로 수치적 구조 위에 있으며, 우리는 그 위에 허상의 경험 세계를 덧입히고 있다.
그리고 AI는 마치 또 다른 진화한 존재처럼, 데이터를 벡터로 전환해 새로운 허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주관적 사유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보는 현실이 곧 본질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환상에 속게 된다는 점이다.
현실을 허상으로 볼 때, 오히려 우리는 더 깊은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