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동현 Oct 22. 2023

거절당하기 연습

(도전 D+5) 322km/ 누적 거리: 1265km

시작부터 내리막을 내달렸다. 더위와 고도로 고생했던 지난날들과 달리 오늘은 제법 수월했다.

80km가 넘는 거리를 평균시속 30으로 달렸다.

컨디션도 좋아서 오늘은 200km를 달릴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더욱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때 갑자기 뒷바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뒷바퀴에서 나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팅..! 팅..!"

작은 마찰음이 나는 상태로 주행했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여러 차례 가방을 고쳤지만, 끝내 문제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근처 휴게소로 대피해야 했다.


맥도날드 앞에서 문을 열어주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리가 떨리고 팔이 저렸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모두 거절이었다.


한참 동안 문을 지키고 서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클락션을 울렸다. 손짓을 하는 그에게 냉큼 달려갔다. Jerome은 멕시코에 갔을 때 차가 고장 났었는데, 나를 보니 그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고 했다.


차의 자리가 없어서 태워줄 수는 없지만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6달러를 건넸다.

돌고 도는 도움을 보며 나도 미국 여행이 끝나면 받은 만큼 돌려주겠노라 다짐했다.


비록 원했던 히치하이킹 제안은 아니었지만, 그의 따뜻한 마음씨 덕분에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빅맥을 먹으면서 근처 바이크 샵을 찾았다. 역시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때 고민에 빠진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주머니들께서 말을 거셨다.

그녀들은 나에게 장소를 옮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주유소에는 차도 많고, 대형마트도 있어서 사람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결국 햄버거를 입에 욱여넣고 무거운 자전거를 끌며 장소를 옮겼다.


아주머니들의 말을 사실이었다. 주유소에는 자전거를 실을 수 있는 큰 차량이 훨씬 많았고, 대형 마트도 있었다.
하지만 주유소에서도 역시 거절은 이어졌다.


방향이 달라서, 자리가 없어서. 각자 이유는 다양했지만 약 20번쯤 거절이 이어졌다. 하지만 운 좋게 또 다른 Jerome을 만나서 20분 정도 차로 이동할 수 있었다. Jerome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친절한가 보다.


하지만 새로 도착한 도시에도 자전거 샵은 없어서 결국 또 이동해야 했다.

이번에는 10번 정도의 거절을 당했다. 체력과 자신감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읽었던 책이 생각났다. [거절당하기 연습]이라는 책이었는데, 저자는 거절을 당했을 때 한 가지를 명심하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내 제안”이 거절당했다는 것.


다시 힘을 내서 히치하이킹을 이어갔고, 운 좋게 Brian과 Tiffany를 만났다. 마침 Gallup이라는 마을로 가고 있던 그들은 흔쾌히 나를 태워주었다. 차에 타보니 안장 위에서는 볼 수 없던 풍경들도 감상할 수 있었다.


1시간이 조금 넘게 달려서 도착한 정비소. 다행히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다. 뒷바퀴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랙이 내려앉았던 것. 물론 그대로 갔었다면 자전거가 고장 났겠지만, 간단한 문제였기에 수리는 금방 끝났다. 정비를 맡아준 Todd는 본인이 한 게 없다며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30km 정도를 달리고 나니 오늘의 숙소가 보였다. 

오늘은 어떤 귀인을 만날지 내심 기대하며 캠핑장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나를 반기는 건 사람이 아닌 들개들 뿐이었다.

급하게 인터넷을 찾아보니 7월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고, 다음 숙소까지는 산길을 55km 정도 넘어야 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페달을 밟았다. 물도 떨어진 상태였기에 일단 편의점에 들렀다.

불안과 공포감에 어떤 물건을 집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편의점에 텐트를 쳐도 되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편의점에 텐트를 친다니. 바보 같은 질문인 걸 알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멍청한 질문인 거 아는데, 혹시 나 오늘밤에 여기 텐트를 치고 자도 될까?"


당연히 거절을 예상했다. 오늘만 이미 30번이 넘는 거절을 당했기에 이젠 거절을 당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당연하지. 여기 뒤에 텐트를 칠 수 있는 곳이 있어."

하일은 아무렇지 않게 내 제안을 수락했다. 그의 말을 듣고는 순식간에 긴장이 풀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이후 믿을 수가 없어서 10번 정도를 되묻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배고프지 않냐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무료로 줄 테니 뭐든지 말하라고도 했다.

장소를 제공한 것도 모자라 시원한 물과 멕시칸 음식까지 선물해 주었다.


“Our world needs more generosity”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더 많은 관용이 필요해)

무심한 듯 뱉은 그의 말이 나를 울렸다.


하일은 나를 데리고 창고와 쓰레기통이 있는 뒤뜰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샤워장도 없는 쓰레기장에서 하루를 보내게 됐지만 너무 행복했다.


내가 미국 횡단을 한다고 했을 때, 남들은 나를 걱정했다. 하지만 내가 두 바퀴로 느낀 미국은 사랑과 친절이 가득했다.


어두컴컴한 산을 달릴 생각에 겁에 질렸던 나에게 희망을 선물해 준 하일. 

내일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또 어떤 사랑을 나누게 될지 기대가 된다.




이전 10화 의심이 확신이 될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