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사색의 밤
1.
상상도 못한 일이다. 내 책장에 수많은 책이 꽂혀있을 줄이야. 이제는 책장에 책을 꽂는 일만큼 설레는 일이 없다. 가끔은 헷갈린다. 책을 모으는 재미인지, 책을 좋아하는 척을 하는 건지. 무엇이 되었든 책을 읽는다는 것에 흠뻑 빠진 건 분명한 사실이다. 공부도 안 하던 내가 책에 흠뻑 빠지게 된 건 한 귀인 덕분이었다. 시식 코너에서 먹어본 음식이 맛있어서 구매하듯, 내게 흥미를 선물해 주었다.
2.
'원형아, 책을 읽어라. 그래야 넓은 바다 같은 세상에서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게 된단다. 정 못 읽겠으면 어린 왕자라도 읽어라.' 이 말은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상이 바다처럼 넓다는 생각을 못 해봤다. 더군다나,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사건으로 당장 책을 읽진 않았지만, 이때의 기억은 영혼에 조금씩 종을 울리고 있었다.
3.
책을 읽게 된 건 군대에서 시작이었다. 1년 9개월이라는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 나를 조종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보이는 동기들보다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치있게 쓰고 싶은 마음이 어느새 책을 펼치게 만들었다. 습관처럼 하품을 했지만, 인생의 낭비한 시간이 많았기에 더 이상 절벽으로 가는 게 더욱 두려웠다.
4.
무식하게, 무지하게 읽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꾸준히 읽었다. 책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는 지도 몰랐다. 단순히 읽어야만 할 것 같았고, 반복되는 하품과 지겨움을 이겨내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인생은 놀랍게도 조금씩,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책은 내게 가능성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습관을 세워 책을 읽고, 달리고, 소심함을 숨기며 적극적으로 나서서 리더도 해보고, 조리병을 교육하는 학교에서는 난생처음 1등까지 해내고 말았다.
5.
세상이 내 편인건진 헷갈렸지만,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누군가 나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었고, 리더라고 따라주던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군대도 최전방이 아닌, 서울권으로 배치 받았으니까. 나는 신을 믿듯, 책이 주는 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불가능하다고만 느꼈는데, 책은 가능하다고 말해주니까. 뭐라도 해볼 수 있었고, 뭐라도 하니 결과가 나오더라. 그리고 그때 알았다. 누군가의 후회는 곧 지혜니까. 그런 지혜를 하나씩 모은다면 내 인생의 시간은 더 밀도 있게 사용하지 않을까?
6.
자대에서도 조리병이라, 꾸준히 책을 읽었다. 조리병 보직이라 새벽에 일어나지만, 밤 12시까지는 꼬박꼬박 책을 읽었다. 읽다가 졸기도 하고, 신나서 시간을 넘기기도 하고, 하염없이 글을 써보기도 했다. 책은 내게 가르침뿐만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온기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시작해 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깨워주었다. 레시피만 있으면 난생처음 만드는 메뉴를 따라 해볼 수 있듯, 책은 레시피 같으면서도 누군가의 반성문이자, 일기장이었다.
7.
어느덧 5년이 흘렀다. 서점에 가는 게 취미가 되었고, 카페에서 책을 읽는 게 취미가 되었다. 책을 읽으니 단순히 인생이 나아진다고 믿었건만 아니었다. 배우는 게 아니라, 깨우는 과정이었다. 서서히 본연의 태초로 돌아간다는 걸 몸소 느꼈다. 대부분 인간은 많은 걸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며 퇴화하고 점차 잊어갈 뿐이다. 그 시간을 막는 것 중 하나가 배움이라 말하고 깨움이라 쓴다. 책을 읽고, 걸으며 뇌에 느껴지는 전기 같은 짜릿함이 증명했다.
8.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알기 위해 책을 펼쳤건만.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이 무지하고 멍청하다는 걸 알아버린다. 마약 중독처럼 이 늪에서 나가긴 어려워졌다. 초기에는 안다는 사실만을 믿었는데 거품 같은 믿음이 부끄럽다는 걸 알았으며, 안다는 건 안다는 게 맞는지 자문한다. 안다고 말하기엔 모르는 게 많기에 침묵한다. 책은 더 나은 인생을 만들어주기보단, 오랫동안 함께해 온 그림자의 역할로 연기하게 만들어준다.
9.
읽기만 하다, 쓰기를 좋아해졌다. 가끔 만나 대화하는 몇몇 사람들은 내 생각에 흥미를 가진다. 그들을 생각 속에 잠수 시켜버리곤 한다. 고요히 생각하는 시간을 선물하는 게 은밀한 취미가 될 때가 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정신'이다. 멋대로 굴던 짐승 같던 정신이 이제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거듭났다. 더 이상 혼란스러운 정신에 잡아먹히진 않는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수많은 지혜 덕분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책으로도, 현실에서도. 그들에게 경청하고 질문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하며 뜨개질하듯, 매듭을 지어왔다. 자만할 이유도 없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그런 인생의 여정을 질리도록 즐기려고 한다. 이런 즐거움을 글로 끄적이며, 사진처럼 추억으로 남긴다는 건 참 낭만이다.
10.
글을 읽고, 쓰는 동안엔 정신병이 걸렸다해도 좋다. 오직 이 순간에 마시는 숨은 달콤하다. 그림쟁이가 자신의 생각으로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듯 마찬가지다. 한창 남 눈치도 많이 봤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내가 읽고 싶은 글, 내가 사랑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