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선택에 관하여

나는 운명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입버릇처럼, '세상'과 '하늘'의 뜻에 늘 끄덕이며 살았기 때문이다.



내 세상을 기준으로 벌어진 사건들은 '운명'으로 해석하기도 쉬웠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는 것도, 새로운 인연과 관계를 맺는 것도, 번개를 맞은 것처럼 삶이 확 변해버린 것도 전부 운명 같았다. 사주도 못지않게 좋아했다. 대부분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사주도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알고 있는 사실에서 변형되는 게 재미있었다. 또 자신을 알아본다는 전제하에 흥미로웠다.



그런데 오늘 생각이 정말 뒤바뀌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느낀다. 사주를 통해 자신을 알아본다. 즉, 사주가 아닌 자신을 스스로 알아볼 생각조차 안 했다는 게으름.



이 글을 쓰기 30분 전, 문득 밥을 먹으면서 사색했다.

'이런 것도 운명이겠지?' -> '운명은 도대체 뭘까?' -> '어째서 난 운명과 하늘을 거론하지?' -> '가만 생각해 보니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선 의미란 발견이 아니라 발명이라던데.' -> '찾는 것이 아니니 주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가는 것인가?' -> '스스로 하늘과 운명을 뜻깊게 생각하는 이유는 뭐지?' -> '세상에 사건들을 이것들로 해석했을 때 편했기 때문이었네' -> '하지만 선택으로 만들어낸 결과라고 해도 말이 되네?' -> '하늘과 운명의 뜻을 떼고 스스로를 바라보니까 무서운데?' -> '왜냐하면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는 것이니까' -> '어쩌면 난 하늘과 운명의 뜻을 방패로 삶을 수비적으로 살아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어 어머니와도 운명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엄만 운명이 있다고 생각해?'

'음.. 주변 얘기 들어보니 운명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주변 이야기 말고, 엄마가 생각하기에'

'뭐, 방송이나 그런 거 보면 운명이 있는 것 같긴 하지? 인연이라는 게 있더라고'

'운명을 인연의 관점이 아니라, 삶의 전체적 관점으로 본다면?'

'(고민 끝에) 그럼 운명보단 스스로 선택하는 게 더 많은 것 같아. 근데 일이 워낙 바쁘다 보니까 스스로 생각할 시간도, 판단할 시간이 없었던 거지.'



삶이 도자기를 빚듯, 선택의 힘으로 빚어져가는 결과물이라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운명'은 결과를 빚어낸 후에 써야만 건강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이 든다. 혹은 스스로 발명가가 되기 위해 최면을 걸어 원동력으로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최면의 도구가 되는 것도 위험성이 크긴 하다. 왜냐하면 선택을 정말 순수하게 한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선택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 틀에 갇혀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걸 알아차렸다면 얼른 그만두는 용기도 필요하다. 꾸준히 끝까지 하는 힘도 필요하지만, 아니다 싶을 땐 그만 놔주는 것도 꼭 필요하다. 그래서 동양 철학의 기본 개념인 '중용(中庸)'의 뜻을 정말 존경하게 된다.



늘 숙명을 기반으로 하늘의 뜻과 운명론을 믿곤 했다. 삶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것이 있을터, 나는 스스로 사색과 성찰을 통해 발견해야겠어'라는 막연한 다짐이 있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발굴해도 계속 발견하고야 만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의 양을 성찰과 사색의 양으로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게 아주 미련한 짓이라는 걸 깊이 깨달았다.



'삶은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가는 것'이 중점이라면 내가 발견했던 모든 조각들은 배를 만드는 데 훌륭한 재료로 쓰이게 된다. 배를 만들어 바다를 항해하는 해적처럼. 오직 바다를 나가고 싶다는 해적의 막연한 꿈처럼. 본받아 막연한 꿈을 꾸고, 조각을 모아 항해하는 것이 이 삶의 중요한 과제라고 느껴진다.



책을 막 읽었던 시절, 감명 깊던 여러 어록들이 떠오른다.

- "알이 외부의 힘으로 깨지면 끝이지만, 내부의 힘으로 깨지면 탄생이다."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날이 있다. 당신이 태어난 날과 왜 태어났는지를 알게 되는 날이다."

- "모든 사람들은 두 삶을 가진다. 그리고 두 번째 삶은 한 번뿐인 삶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시작된다."



난 바보 인가 싶다. 이런 단순한 문제를 몇 년째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난 겁쟁이었다. 세상에 모든 걸 책임질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운명과 하늘에 뒤에 숨어,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찾아 나섰다. 숲에 물건을 놓고 왔다는 핑계로 숲의 이곳저곳을 한 번 즐겨보고 싶었다. 호기심 덕분에 많은 조각들을 모아봤으며, 이젠 멈출 때가 왔다고 느낀다. 뒤에 숨지 말고 일어서서 모든 뜻은 스스로 만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좋은 선택과 판단을 할 수 있게 맑은 정신과 강인한 육신을 키워내 아름다운 결과를 빚어내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사람, 여러 관계 모든 상황은 앞으로 '운명'과 '하늘'의 뜻이 아닌,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거. 그리고 다 내 노력에 달렸다는 거. 그렇게 더 행복과 자부심을 느끼기로.



아무도 나의 뜻을 꺾을 수 없게, 강인한 전사처럼. 뜻을 뜻대로 밀고 삶의 주인이 되어야 된다. 그리고 오늘 난 그걸 절실히 온몸으로 느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후로 온몸에 닭살이 돋았으며, 잠깐 몸의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나는 또 무엇인가를 믿게 될 것이며, 그런 믿음이 인생의 원동력이 되는 순간 기름 없이 움직이지 못하는 차와 다름없다. 내 인생엔 기름 따윈 필요 없다는 걸 안다. 이걸 알아차려주고, 글을 써서 정리한 스스로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때가 됐나 보다. 변화할 때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회의감이 든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