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80주년
학창시절 현장학습으로 다녀왔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성인이 되고 처음 왔다. 최소 15년은 지난 어렴풋한 기억을 가지고 독립문을 지났다. 태극기를 흔들며 사진 찍는 어린 아이와 가족, 연인, 그리고 혼자 다니는 분도 종종 보였다. 어린 아이의 부모들은 나이대가 비슷해보여도 나완 분명 달랐다. 광복절을 그저 공휴일로 치부하며 개인 시간을 갖던 나와 다르게, 우리 민족의 얼을 후손에게 몸소 가르치고 있었으니까.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강점기에는 독립 운동가들이, 광복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된 감옥이었다. 총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감되었다는 사실과 사형 집행, 고문 방법, 화장실 없는 1평 남짓 독방을 보며 느껴지는 감정은, 내 표현력으로 다루기가 참 어렵다. 답답함과 먹먹함, 눈물이 고이기도 하며 분노가 일어난다. 벽보에 적힌 글 들이 너무 끔찍하여,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인지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비명 소리를 숨기고자 한 것인지 지하에서 고문을 했고, 사체에 남은 고문 흔적을 은폐하고자 철로된 관에 가둬 가족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에 주먹을 불끈쥐었다. 기억에 남는 고문들을 이곳에 다 옮기기에는 너무 잔인하여 이 글의 본의를 해치고, 독자분들로 하여금 불편해질 것이 분명하여 이하 생략한다.
고문은 몸의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괴로운 일이다. 가족을 인질로 삼거나, 내가 잘못되었을 때 남겨질 가족을 상상해야한다. '나만 개죽음', '이번 한 번만 눈 감으면'이라는 생각과 싸워야한다. 심신미약 상태로 말이다. 그럼에도 저항하셨다는 사실은 내 마음에 작지 않은 파동을 일으켰다.
독립 운동가 중 열사님들은 특별히 내 마음에 닿았다. 열사라는 칭호는 무기없이 저항하셨던 분들을 일컫는다. 물론 의사분들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열사라는 분들이 더 멀게 느껴진다. 군인으로서, 전쟁에서 적을 본다면 무기로 살상하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을 위협하는 대상에 무기없이 저항한다는 것은 상상 하기도 어렵다.
향년 17세에 옥사했던 유관순 열사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시고, 같은 해 4.1 대규모의 아우내 만세 운동을 주도하셨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아버지와 이웃 몇 명이 현장에서 사망하는 것을 보셨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도 옥중에서 동료 수감자들과 만세 운동을 계속했고, 더 가혹한 고문을 받으셨고 결국 순국하셨다는... 경외심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와 독재 정권의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처세할 것인가 물었다. 그럴수록 독립 운동가님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기껏해야 마음 속으로만 저항할 것이고, 겉으로는 외압에 굴복하며 따랐을 것이다. 나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위험이 거의 없다고 느껴지는 독립에만 손을 보탰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지만... 그렇다. 내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겠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럼 이런 것들은 대체 뭐가 중요한 것인지 물음을 던졌다. 명쾌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찾아보러 노력했다.
먼저 평소 나의 고민들은 누군가 염원할 수 있는 행복한 고민이라는 것이다. 입사한지 얼마 안된 회사에서의 작은 갈등, 결혼과 집값, 노후 등 가까운 미래에 대한 고민은 잠시동안 이나마 한없이 작게 보였고, 일종의 집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유를 갖고 다시 돌아보니, 결국은 현재 자리에서 소신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과, 해야할 일들을 담담히 해 나아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다녀오며 마음속에 일어난 메시지들 모두 내 소중한 재산이다. 앞으로 공휴일에는 그 의의를 되짚어보고 마음 가짐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으려 노력할 것이다. 역사관 뿐만 아니라 박물관, 전시회는 어쩌면 보물지도일지 모르겠다. 여정에서 무엇이라도 깨달았다면, 분명 앞으로의 삶에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글로 쓴 것은 극히 일부이다.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대기줄이 있을 정도로 많은 인파와 웃음들, 거대한 태극기가 있는 포토존. 광복절이 아니더라도 다녀와보시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