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접종 너머의 순간
미군부대 예방접종실에는 매일같이 다양한 아이들이 찾아온다. 걸음마도 못 하는 갓난아이부터, 말대꾸가 제법 늘어난 초등학생, 중고등 학생까지. 예방주사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엄마가 어르고 달래서 병원에 데려와도 주삿바늘을 본 아이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도망가기 일쑤다. 그럴 땐 아이도, 간호사도, 모두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부모님께 아이를 꽉 잡아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가끔, 도망가지도 못하고도,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흐느끼는 아이들이 있다. 이런 친구들을 보면 어릴 적 나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럽고 짠한 마음이 든다. 말 잘 듣고 착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마음속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무서워도 울지 말고, 아파도 얌전히 있어 돼. 그래야 부모님께 칭찬받을 거야.'
어제 만난 9살 남자아이는 딱 그런 아이였다. 아직 주사도 맞기 전인데 벌써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엄마는 “아직 맞지도 않았는데 왜 울어?” 하며 핀잔을 줬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아이는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내 마음 쓰였다.
“내가 주사 맞을 때 손 잡아줄까?”
컴퓨터 기록을 멈추고 뒤돌아 물어보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이 옆에 앉자마자 아이는 말도 없이 내 품에 안겼다. 안겨있는 아이에게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주사를 맞는 데는 10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 짧은 10초 동안 아이와 연결되었던 느낌이 들었다.
그저 손 내밀어주는 것뿐이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방식이 작게나마 상대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다정하게 바라봐주는 것, 한마디 말로 마음을 만지는 것이 생각보다 더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일이 많을수록, 반복될수록 나도 모르게 환자들에게 기계적으로 굴게 된다. 하지만 이 아이를 보며 간호사의 업무는 누군가의 몸을 돌보는 일이지만 어쩌면 마음을 더 많이 만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그 아이를 품에 안은 순간 나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일의 본질을 떠올렸다. 가냘프게 떨리던 아이의 어깨가 내 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내가 하는 일이 단지 주사를 놓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이기도 하겠구나. 그러니 신속하게 주사를 주고 서둘러 끝내려고 할 게 아니라, 주사를 맞는 그 순간이 환자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진심으로 다가가자. 그날 나는, 조금 더 사람답게 일했고 조금 더 간호사답게 존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