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당신의 이야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자신의 안식처를 찾아 잠이 든 시간이었다. 평화롭고 나른하게, 특히 이 시간대가 만들어 낸 손 쓸 수 없는 나른함을 남자는 사랑했다. 남자 곁엔 지금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녀가 잠에 들어있다. 남자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금 집어 만지작거렸다. 이 머리카락은 남자의 안정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남자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햇빛에 비치면 붉은색을 띠는 게 아닌가 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 머리카락도 그리고 이 머리카락의 주인인 그녀도.
조금 전 남자는 샤워실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이 여자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상체를 옆으로 기울여 젖은 머리카락을 흰 수건으로 꾹꾹 눌렀다. 그리고 남자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랑해.”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둘은 그 사실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듣고 싶었다. 그리고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를 보곤 씩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
남자는 원하는 답을 내주지 않은 그녀에게 무한한 끌림을 한 번 더 느꼈다. 조금의 원망도 함께. 그리고 이 일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이 샤워실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남자가 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남자는 자신이 그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슬퍼졌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에게 있어 사랑하는 남자이다. 그런 나는 그녀와 아무도 방해 할 수 없는 밤을 보내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남자를 다시 편안함으로 이끌었다. 남자는 흰색 커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 이 커튼은 해가 낮에서 밤으로 가는 모습을 사랑한 탓에 커튼이 된 걸까? ’
하는 멍청한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멍청한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하는 이는 사랑하는 대상의 모든 모습을 보고 싶어 할 테니까.
남자는 사랑한다고 말한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때 자신의 목소리는 공기를 타고 집에 살짝이 울렸었다. 그 순간 남자는 왜인지 모를 쑥스러움을 느꼈다.
‘왜 나는 그때 쑥스러웠을까..?’
남자는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한 울림이 남자의 사랑 고백을 자신에게 한 번 더 알려서였을까? 아니면 남자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이 여자를 많이 사랑해서였을까? 남자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커튼은 선풍기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흩날리고 있었다. 꼭 물결같이 말이다.
‘물결…수백개의 물결…’
남자는 자연스럽게 아니 어쩌면 마음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를 수백 개의 파란색 물결이 가득 담긴 아쿠아리움을 생각했다. 아쿠아리움은 3일 전 그녀와 함께 갔던 곳이었다. 수족관 안은 어두웠다. 여느 아쿠아리움처럼 밝기 정도는 비슷했지만 눈이 쨍쨍한 바깥에 익숙해져서인지 더 그렇게 느껴졌다. 수족관의 수많은 기포는 어류들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고 어류의 헤엄은 수족관에 물결을 만들어 냈다. 바다 안에 있는 느낌을 주는듯한, 위에서 아래로 내리 비추는 빛은 그 물결과 만나 수백 가지의 파랑을 만들었다. 각각의 파랑들은 이름을 지어줄 것 없다는 듯이 또다시 서로 섞이길 반복했다.
물고기를 재미있게 구경하던 그녀는 괴상하게 생긴 심해 어류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살짝 돌려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찌푸림은 그 심해어류를 보고 한 것이었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하니 남자의 마음 한쪽 저리게 만든다. 그 저림은 언젠가 자신에게도 그런 경멸을 보일까 하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자는 그 아픔을 재료로 삼아 여자가 자신의 곁을 떠나가는 상상을 했다.
‘언젠가 저 검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을 창백하게 띄우고, 해님 같은 그녀의 눈이 나에게 아무런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그리고 스쳐 지나간다. 지금껏 사랑해 왔던 이 여린 어깨가 자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점차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그리고 그곳엔 그녀가 말한 이별 사유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
남자는 이별 후 생각보다 짙은 기억의 밀도와 몰려오는 추억의 모서리에 수없이 부딪힐 자신을 생각한다.
‘이별…그녀와…. 그녀..’
그녀는 검은 눈동자가 참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남자는 그 눈동자가 알 수 없는 사람을 나타내는 징표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갈색 눈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어있지만 그녀의 검은 색 눈동자는 달랐다.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는 그런 점에서 자신이 을이라는 느낌을 항상 받곤 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코는 참 귀여웠다. 물론 그녀는 그 코가 뭉툭하다며 늘 마음에 불만을 두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의 선명한 인중 아래에 있는 입술은 남자가 그녀를 위해 자꾸만 무언가 하게 만들었다. 그 무언가는 그녀를 위해 인형을 사준다거나 일에 시달려오는 날에 매운 음식을 사주는 일이었다. 결국 그 일들의 최종 목표는 그녀를 웃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웃는 게 이쁜 사람이니까. 갑자기 그녀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가끔 지치면 말이 없어지고 멍해진다. 그럴 때는 어서 재워야 한다. 하지만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땐 웃으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온다. 그 모습이 마치 귀여운 토끼 같다고 생각했다. 이미 답을 정해놓고 온 그녀를 위해 정해진 답을 말해주는 것도, 그녀를 만나기 전에 재미있는 개그를 구상하는 일도 자신에게 있어 너무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럴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고, 그녀가 웃는 이유 중 하나가 될 수도 없다. 자신은 언젠가는 그녀가 우는 이유가 될 것이고, 또 언젠가는 그녀가 화가 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녀가 자신과 함께 한 사진이나 공유했던 물건을 치우게 되면, 혼자인 일상이 익숙해지면, 남자는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냥 심해어류가 되는 거다. 마주치면 눈을 찌푸리다가 휙 돌아서 가버릴 그런 심해어류. 남자는 언젠가 자신이 심해어류가 된다면, 그녀를 위해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위해 저 깊고 짙은 파랑 속에 자신을 가라앉히겠다고 생각했다. 온몸이 아파온다. 자신도 언젠가 그녀 없는 세상으로 갈 수 있을지 그리고 그런 나날이 어떨지 상상한다. 아주 깊은 심해 속을 헤엄치다가 함께한 추억과 가시 같은 미련이란 비늘을 뗀 심해어류는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태양의 빛을 지도로 삼아 위로 향한다. 남자는 평범하게 자신의 세상을 잘살고 있는 다른 물고기를 본다. 헤엄을 치며 하루하루를 살다 그렇게 문득 깨닫는 거다.
그녀는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 어쩌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남자는 자기 입술을 깨문다.
그 마음이 자신의 것임에도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 듯하다. 마치 현실에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자는 그 느낌으로 인해 상상 속에서 튕겨 나온다.
다시 그녀와 함께인 침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남자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콧속으로 들어온 그녀의 레몬 향은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전까지 머금고 있던 상상이 마치 환영이었다거나 거짓이었던 것처럼 사라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