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한다지. 우리 엄마 고슴도치는 참으로 그랬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던 결혼 생활을 보낸 우리 엄마는 나에게 어떤 '특별함' 필터를 씌워 당신 스스로 위로를 받았던 걸지도 모른다. 아버지와의 말다툼이 끝나면 엄마는 늘 조용히 책을 읽는 내 옆에 와 '나중에 커서 뭐가되고 싶니?' 묻곤 했다. 어렸지만 나는 그 질문에 답이 정해진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대 가서 선생님 할 거야' 엄마가 좋아할 것 같은 대답을 했다. 집안의 냉랭한 공기와, 엄마의 측은한 눈빛이 '그게 정답이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걸 매 순간 느꼈다. 우리 엄마는 아니었다. 끊임없이 엄마 고슴도치가 되어 나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지 않았다. 그래서 난 '도달할 수 없는 나'에 닿으려 열심히 내 인생을 허우적댔다. 결국엔 특별할 것 없는 경험 제로인 사회초년생으로서 월 200 인생을 시작할 때도, 지긋지긋한 무한 야근에서 벗어나 퇴사를 질렀을 때도, 우리 엄마는, 그리고 나는 그 끝엔 어떤 특별함이 있겠지 하며 텅 빈 상자를 계속 뒤지는 짓을 계속했다.
넌 어릴 때부터 외골수여서생각을 알기 어려웠어.
그렇게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결정하고엄마에게 통보하다시피 출발 날짜를 얘기했을 때다.내 결정에 원망 섞인 말로 얘기하던엄마의 말은 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냥 여기서 안정된 직장 가지고 살면 안 되는 거야?", "차라리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보는 게 어떠니?", "남들은 공기업도 척척 붙더라" 퇴사 후 방황하던 나에게 쏟아진 이 모든 말은 나를 결단코 호주로 향하게 하기 딱 좋은스위치였다. 나에게 특별함 필터를 씌우던 엄마는 어느새 '평균'만 같길 바라고 있었다. 평균이 되는 것마저 어려운 때가 된 건지, 아니면 원래 평균도 못 미치는 어른이었던 건지 회의감에 젖기도 잠시, 그렇게 호주로 홀로 향해 내 인생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걱정 한 무더기, 기대 한 올, 두려움 한 움큼, 해방감 한 줌 정도를 들고 출국했다.
호기롭게 호주에 첫 발을 디딘 나는 쏘아보듯 나를 꿰뚫는 햇빛에 금방 풀 죽었다. 가뜩이나 무거운 배낭까지 가세해 내 자신감을 자로 잰다면갓 자란 잡초만도 못할 것이다. 꼬박 하루를 비행하며 바싹 마른오징어처럼 온 기운이 쭉 빠진 상태였다. 그토록 소망했던 워킹홀리데이의 시작은 그다지 낭만적이지도, 해방감이 느껴지지도 않다는 걸 호주의 뜨거운 태양이 무심하게 말하고 있었다.
해야 될 것들이 산더미였지만, 애석하게도 난 지쳤고 쫄아있었다. 지치는 건 괜찮지만 쫄아 있는 건 큰 문제다. 쫄면 될 것도 안된다. 난 어릴 적 가시밭길(?)이었던 스파르타식 영어 사교육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비행기에서 펜을 달란 내 요청에 패드를 주던 승무원과의 대화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며 자신감을 가져보기로.
갓 자란 잡초의 자신감이더라도 난 잡초처럼 끈질기게 이곳에서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나는 30분, 1시간은 걸어야 마트가 있는 시골 변두리에서 살아보기도 하고, 독감과 코로나가 연이어 걸려 죽을 고생을 하기도 하고, 차를 타고 한 시간을 가야 있는 공장에 히치하이킹으로 면접을 보기도 하고, 백팩커스(기숙사형 임시 숙소)에서 6개월간 지내기도 했다.
6개월 중 4개월을 보낸 한 백팩커스는 가장 많은 추억이 있던 곳이다. 시골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어느 날, 계획 없이 도시로 가겠단 막무가내 결심으로 살림살이(?)를 바리바리 챙겨 같이 일하던 동료의 차를 얻어 타고 입소하게 된 곳이었다. 이 숙소의 첫 인상은 한마디로 '날 것'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생전 처음 맡아본 냄새가 확 풍겼고, 나는 곧 이 냄새가 대마초 냄새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흘러나오는 보사노바 풍의 음악과 체크인하는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공장 동료의 눈빛의 조합은 참 아이러니했다. 느긋하게 태닝을 하는 사람, 테라스에서 대화하는 사람, 대낮부터 맥주병을 들고 흥이 난 사람, 빨래감을 한 무더기 들고가는 사람. 그 사람들 중 한국인은 커녕 동양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숙소는 다양한 인간상의 집합소였다. 나처럼 디자인과를 졸업해 해외 취업을 하기 위해 페인터로 일하던 이탈리아 친구, 여자친구와 호주 사막을 여행하다싸움이 나 사막 한가운데 버려졌다 히치하이킹을 해서 도시로 다시 살아 돌아온 스페인 친구, 호주의 끝내주는 날씨에도 하루종일 누워있다 게임만 주야장천 하다가 저녁엔 맥주를 들이켜던 프랑스 쌍둥이 형제(쌍둥이 중 한 명은 돼지 멱따는 듯 꽥 소리를 지르는 잠꼬대 때문에 아주 싫어했다), 침대 밑에 먹을 걸 잔뜩 넣어놓고선 늘 나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던 칠레 친구, 매일 매일 로비에서 술을 마시며 밤 늦게서야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는 뉴질랜드 친구 등. 그들 사이에서 전형적 한국인 마인드로 열심히 돈을 벌던 나.
나는 이 곳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운좋게 회사가 즐비한 거리 한복판의 바쁜 레스토랑에 바로 취직했다.
정신없이 일하고 난 하루 끝에 꼭 하던 한 가지 루틴은 바로 퇴근길 와인 한 병을 사서 발코니에 앉아 늦은 저녁과 함께 마시는 것이었다. 혼자 그렇게 궁상떨다 보면 오지랖 넓은 옆 방 친구들과 내 방 친구들이 찾아와 꼭 하루를 묻곤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된다.
오늘은 어떤 진상이 있었고, 팁을 얼마를 받았고, 지금 한국의 날씨는 어떻고. 서로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와 호주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다 보면 비워지는 와인병과 함께 시간은 자정이 훌쩍 지나있다. 보통은 자기 침대로 돌아가는 결말이지만, 가끔은 이 밤을 즐기러 다 함께 즉흥으로 클럽에 향하기도 하고, 누군가 배고프다며 칭얼대면 다 함께 야식을 만들기도 하고, 몇몇만 남아 두런두런 진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런 생활을 하다보니 급기야 나는 영어로 꿈을 꿀 지경에 이르렀다. 가끔 한국의 가족과 통화하면 잊어버린 단어를 생각하느라 한참을 머리를 굴릴 정도로 내 주변은 철저히 영어였다. 그러나 그만큼 고립감에 힘들기도 했다.
나는 평일 점심과 저녁엔 레스토랑에서, 퇴근 후 새벽엔 근처 이자카야에서, 주말엔 푸드트럭에서 일을 하며, 번 돈을 쓸 시간과 에너지마저 없이 정신없이 일했다. 특별하지 않다면 성실함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때문이었을까? 혈혈단신 동양인 여자가 외국에 홀로 떨어진 이 상황은 불안감과 생존력에 더 불을 지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그치며 몰아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