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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비 Oct 30. 2024

한녀의 호주 적응기_3


  호주는 일본음식을 정말 사랑한다. 길거리에 저렴한 초밥 테이크아웃 전문점부터 고급 일식 레스토랑까지 일식을 즐길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 나는 그중 지어진 지 50년은 된, 역사가 꽤 있는 일식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오피스 중심가에서 유일한 일식 레스토랑으로 50년동안 터줏대감이었으니 단골이 무지하게 많은 건 당연하다. 70년대 쯤부터 써온 금방 분해될 것 같은 식기세척기와 수기로 장부를 쓰는 주인의 대단한 고집과 정성이 담긴 곳이다.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가진 단골들을 위해 세심하게 기억할 것들도 많았다. 단골손님 단 한 명만을 위한 메뉴도 고, 할인율도 달랐으며, 식사 스타일과 습관에 따라 '눈치껏' 해야 할 일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센스 있게 일하면 팁 문화가 아닌 호주더라도 하루에 50불 넘는 팁(한화로 자그마치 450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부자 손님들이 종종 주는 어마무시한 팁

 
 물론 처음부터 팁을 받을 만큼 일을 잘했던 건 아니다. 민망한 실수도 정말 많이 했고 손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실수를 많이 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기억에 남는 일화를 하나 말하자면, 단골 노부부 손님에게 국을 서빙하다가 식탁에 쏟았던 적이 있다. 다행히 손님 옷에 묻거나 다친 건 아니었고, 나는 죄송하다며 얼른 행주로 테이블을 치웠다. 하필이면 단골손님한테 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일하는 내내 맘에 걸렸다. 그런데 마감할 즈음 사장님이 갑자기 20불을 주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노부부 손님이 내가 놀랐을까 봐 달래주고 싶어 팁을 전해달라 하셨던 거다. 돈을 떠나서 그 마음이 정말 고마운 순간이었다.  

 노부부 단골 외에도 다정했던 손님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산타 같은 발그레한 볼과 인자한 웃음을 닮은 노신사 '존'도 그중 하나다. 존은 매주 월요일 점심마다 꼭 똑같은 자리에 손녀와 함께 앉는다. 고민하듯 하면서도 늘 똑같은 벤토(일본식 도시락)와 키자쿠라 사케를 주문하면 맞은편에 앉은 손녀는 못 말린다는 듯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매주 보는 풍경이지만 이 뻔한 장면을 좋아했다. 존은 못 오는 날엔 전화로 미안하다며 다음에 보자고 할 정도로 이 식당과 연이 깊다. 지금도 존은 매주 월요일마다 식당을 찾아오겠지? 늘 내 이름을 먼저 불러주며 오늘 기분이 어떤지, 기분이 안좋을땐 장난치며 달래주기도 하고, 웃을때마다 뷰리풀하다며, 나에게 해피바이러스를 매주매주 주던 존. 처음엔 이런저런 말 건네는게 굉장히 부담스러웠는데, 나중엔 이 사람 덕분에 내 하루 중 활짝 웃을 기회가 한번이라도 생긴게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내가 일했던 식당은 손님들과의 접촉이 꽤 컸다. 이곳은 코로나 이후 급증한 모바일 주문도, 배달 서비스도 없을 뿐더러, 매주 혹은 매달마다 오는 수 십 년 된 단골도 수두룩했다. 그렇다 보니 의사소통이 수월할수록 단골들이 주는 팁의 액수도 올라갔다. 홀 직원은 나 혼자거나 둘 뿐이었기 때문에 팁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일한 지 꽤 됐을 땐, 나만 가지라며 나에게 따로 팁을 주는 손님들도 더러 있었다.



 A4용지에 글씨만 적힌 메뉴판을 고수하는 것도 사장님의 굉장한 고집이다. 덕분에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다. 새로 온 손님들이나 일본어의 영어 표현은 생소한 사람들이 많고, 알레르기에 민감한 외국이니 어떤 재료로 어떻게 요리되는지, 글루텐 프리(밀가루 음식에 들어있는 글루텐 성분이 없는 음식)로 변경이 가능한지, 비건을 위한 요리는 있는지 전부 영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이 글씨만 딸랑 적힌 메뉴판아주 불친절했기 때문에 친절한 직원인 내가 설명해줘야 했다. 나는 스크립트를 만들어서 끊임없이 자연스럽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공부했다. 툭 치면 나올 정도로 식당 관련 표현을 체득했고, 처음엔 부자연스럽던 표현들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으며(?) 계속 스크립트를 업데이트해 갔다. (이 정도면 팁 많이 받을만하지 않나요..?)

특히 실수했을 때 그냥 헤헤 웃으면서 바보같이 무마하고 싶지 않았다. 실수를 하더라도 영어로 명확하게 사과하고 상황 설명을 하고 싶었다. 고작 레스토랑 직원이었을 뿐이지만, 돈 버는 수단 이상의 것을 얻어 가고 싶었기 때문에 열심히 했다.


항상 지치는 퇴근길



 서비스업은 융통성이 정말 중요하다. 융통성은 영어를 잘하는 것과는 별개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손님에게 예스맨이 되어선 안되고, 그렇다고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큼 차갑게 대해서도 안된다. 항상 좋은 단골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꺼리는 단골이 몇 있었는데, 소위 왕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영리해야 한다. 열심히만 하면 아무도 모른다. 사장님한테 티를 내줘야 한다. '얘가 이러 이렇게 해달라는데 안된다고 설명했는데도 자꾸 그래ㅠ'라는 식으로 선을 그어줘야 사장도 내 능력을 의심 안 하고 시급도 잘 올려준다. 더욱이 이런 손님들은 정성을 다해도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당히 사무적으로 대해줘야 내 정신건강에도 좋다.


 여기서 팁 하나 더 얘기하자면, 보통 캐주얼잡이더라도 한 곳에서의 경력이 쌓이면 사장 재량으로 시급을 올려주기도 하고, 직원이 올려달라고 요구도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일하는 곳이 2개월이 넘었는데도 시급이 오르지 않았다면 당당히 건의해 봐도 좋다. 2-4개월에 한 번씩 내 몸값을 올릴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2번 시급이 올랐다. 사장이 다행히 좋은 분이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때가 되면 올려주셨다. (큰 실수를 하지 않고 성실한 건 기본 조건이다)


레스토랑 근처 공원 풍경



 나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강한 편(외국 나와보니 깨달음)이다. 일식 레스토랑에서 일하다 보니, 간혹 손님들이 나를 자연스럽게 일본인으로 생각하곤 일본어로 말을 걸기도 했다. 악의 없는 성의 일지라도, 한국인인 나는 기분이 썩 좋진 않은 건 사실. (심지어 사장도 일본인이 아닌데!) 일식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모든 동양인이 일본인일 거라는 생각을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하지만 나를 일본인으로 보는 시선을 역으로 잘 이용할 수도 있다.
나는 서빙은 물론 계산과 음료 제조 등 올라운더(All-rounder, 주된 업무 외에도 다양한 일을 하는 포지션)여서, 계산할 때 손님들과 스몰토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참 많았다. 서비스에 만족한 손님들은 간혹 내 이름을 물어보기도 하는데,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한국'에서 왔어~ 를 콕 집어 알려준다. 그러면 대게 손님들도 아 정말? 나 예전에 한국 갔었는데 너무 좋고 어쩌고~, 한국인 동료가 있었는데 좋은 친구였고 블라블라로 응수해 준다. 뭐, 얼추 백인들 예쁨 받고 싶은 동양인 포지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잘했을 땐 내 nationality(국적)을 반드시 티 낸다는 거다. 대신 실수했을 땐 일본인이라 생각하게 내버려둔다. 하루는 한 손님이 '너는 한국인인데 왜 일식 레스토랑에서 일해?'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나 원참, 일본인만 일식당에서 일해야 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돈 버는 데는 국경없어'라고 대답했다.



 매일매일 다른 메뉴로 도시락을 싸줬던 남사장님 게리. 딸같다며 잔소리를 하면서도 누구보다 정이 많았던 여사장님 스테이시. 매일 같이 티격태격하며 함께 일한 쉐프 리처드. 내가 실수해도 늘 든든하게 같이 함께한 무니 언니. 우리 식구들, 다들 그곳에서도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호주워홀시절 내 소울푸드였던 쌀국수
내 생일을 적어둔 사장님
생일선물로 받은 귀걸이
매일 다른 메뉴로 점심 저녁을 준비해준 개리
카지노가는게 취미인 스테이시가 사준 카지노 스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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