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DNA'라는 숙명

by 주비

늘 마음 한 켠에 어딘가로 멀리 떠나 내 삶을 개척해 나가는 로망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좀 더 당당하게, 좀 더 나답게, 눈치 보지 않고 사는 멋진 내가 있을 거라며.

어릴 적, 술 취한 아빠가 훈장처럼 들고오던 인형들이 잔뜩 쌓인 옷장에 기어올라가 읽던 책은 주로 모험을 하며 쟁취하는 이야기였다. 내 안의 모험 정신은 그 옷장 구석에서부터 차근차근 자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 대학교에서 필드트립(학생들의 견문 향상을 위한 답사)으로 처음 여권을 발급해 싱가포르에 갔을 때는 온갖 어색함 투성이었다. 재료가 무엇인지 당최 모르겠는 음식을 먹어보고, 한국과 다른 이곳의 생소한 규칙들을 신기해하고, 그저 길을 걸을 뿐인데도 어쩐지 긴장하고 주눅 들었다. 짧은 견학 후 한국에 도착했을 땐, 정말 맛있는 음식을 딱 한 입만 먹고 다신 먹지 못하게 된 기분이었다. 새로운 것들을 또 맛보고 싶고, 조금은 슬프기까지 했다. 싱가포르에서 이것저것 재며 하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지만, 다음엔 좀 더 여행하는 곳을 온전히 즐겨보리라.


나의 두 번째 해외여행은 대학교에서 준 두 번째 기회였다. '베트남 낙후지역의 교육 개선'이란 명목으로 베트남 깡시골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 고난의 입시 준비 끝에 대학교를 가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던 당시 나의 시야를 확 트이게 해 준 경험이었다. 게다가 이 여행은 이후 내가 다시 베트남으로 모험을 결심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추억이 됐다. 그렇게 푼돈을 모아 2~3번 정도의 해외여행을 더 했고, 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한국에서 취업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한국에 정착했다. 안타깝게도. 그러나 끝까지 읽어보시라.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빴던 나는 그럼에도 언젠가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리라 생각했다. "난 다시 20대가 된다면 회사 때려치우고 워홀은 꼭 갈 거야"라는 회사 선배의 말에 내 의지는 더욱 불이 붙었다. 1년을 열심히 헌신했음에도 갈 길이 먼 연봉은 말할 것도 없었고, 당시 코로나의 여파로 노동력이 부족한 호주 정부는 비자 발급비용을 무료로 지원하는 파격적인 긴급 정책을 발표한 이 때, 나는 운명이 부르는 듯 기꺼이 호주로 향했던 것이다.



나는 호주에서 지내는 동안 한국인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어울리지 '못'했나? 열심히 입시 공부해서 인서울 학교에 들어가고 취업 준비를 해서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공무원 준비를 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한국의 암묵적인 견고한 사회 통념은 머나먼 호주 땅에서도 굳건했다.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여기가 한국인가 싶을 때가 많았다. 임시 숙소에서 한 달 머무르다가 집을 구하고 돈 잘 버는 자격증을 따 일을 구하고 한 달에 얼마를 모아야 하고...한국인들과 이야기할때마다 워홀 생활마저 보이지 않는 단계가 있는 듯 느껴졌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면 낙오자가 듯한 느낌이 들도록 온 한국인들이 부추기는 것 같았다. 물론 모든 한국사람이 그렇진 않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런 통념이 진절머리나고, 반항하고 싶더라도 나는 살아도 괜찮다는 데이터를 내 인생에 쌓은 적이 없었다. 내 한국인 DNA는 끊임없이 내가 낙오자로 남을까 전전긍긍하고 불안하게 했다. 그렇게 호주에서 지낸 지 1년이 되자, '너 앞으로 뭐 할 건데? 전공은? 여기서 외국인 노동자로 언제까지 지낼 순 없잖아'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해질녘 하늘은 꼭 감상해줘야한다
잔업 후 퇴근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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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