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에 기대어 의미를 찾다

by 주비

호찌민의 한 호스텔에서 만난 이 미국인은 코로나로 사업을 접고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몇몇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나는 피곤했던 하루 덕에 기절하듯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로비에서 그와 다시 마주쳤지만, 며칠 뒤면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굳이 누군가와 친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의 질문에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짧게 대답 후 혼자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어느 저녁,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내게 함께 가자고 손짓했다. ‘이렇게 불친절한 동양인에게 놀러가자고 하다니… 이게 미국식 소셜라이징인가?’ 잠시 망설였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날부터 인도, 벨기에, 독일, 호주, 말레이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과 밤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호스텔에서의 시간을 쌓기 시작했다.


Z(그 미국인을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는 로비에서 마주칠 때마다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엔 그 특유의 해맑은 외향성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와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내 안에 켜켜이 쌓였던 우울감이 조금씩 걷히는 걸 느꼈다.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몇 달은 함께한 듯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는 아침마다 나를 기다렸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내 곁에 있고 싶어했다.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빠르게 흘러 출국 전 날이 되었다. 그는 마지막 날을 기념하자며 부이비엔 스트리트의 한 루프탑으로 나를 데려갔다. "진짜 가기 싫다." "그럼 가지 마!"라는 식의 대화만 오갈 뿐,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서로 아쉽고 숙연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좋은 꿈을 꾸다가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다가오는 아침을 부정하고 싶은 이불 속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서서히 덮쳐오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내치려 나는 테킬라를 연거푸 마셔댔다.

부이비엔에서 마지막 날


다음날, Z는 자신의 오토바이 뒷자리를 내주며 마지막으로 시티 투어 가이드를 자처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데이트였지만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 떠나게 되면 영원히 못 볼 수 있는 이 상황이 참으로 묘했다. 혼란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럽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우리는 동물원 구경을 했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어느덧 공항에 갈 시간이 되었다. Z는 공항까지 배웅해주기로 했다. 배낭을 매고 오토바이 뒷좌석에 올라타 공항으로 가는 서늘한 저녁. 난 아쉬움 반, 오토바이를 타고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에 홀가분함 반, 꼭 다시 오리라는 결의를 다졌다. 우습지만 내 인생의 다음 챕터를 위해서 이곳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공항에 도착하자 갑작스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듯 무지막지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에 가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라며,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을 했다. 진심이 묻어난 그의 말에 말없이 웃으며 나는 비행기 편을 확인하기 위해 스크린을 훑었다. 음..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도 내가 탈 비행기 편이 공항 스크린에 뜨지 않았다. 혹시 내가 못본건 아닌지 눈을 잔뜩 찡그리고 봐도 없었다. 비가 많이 와서 지연되거나 취소됐나 싶었지만 어떤 안내 문구나 방송도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을 다시 확인한 내가 탈 비행기는 바로 어제, 내가 테킬라를 쭉쭉 들이키던 그 시간에 이미 한국으로 떠났던 것. 고로 어제 떠난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오는 헛수고를 했다는 뜻이다.


지난 날짜임을 확인하자마자 Z와 나는 눈을 마주친 채 얼어붙었다. Z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며 사과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가는 게 아쉬웠는지 꼭 지금 돌아가야 하는 거냐는 말만 며칠 동안 수십 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기 때문이다. 비가 많이 내리면 한국가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다, 내가 넘어질 뻔하면 이것 또한 한국 가지 말라는 뜻이다, 쌀국수를 먹다 매운 고추가 목에 걸려 켁켁대도 가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라면서 염불을 외던 자신의 소원이 아이러니하게도 이루어진 순간이 아닌가. 이 모든 순간마다 난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행기까지 놓쳐버린 지금은 이 모든 일들이 필연인 것만 같은, 아니 필연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비행기 표를 확인하기 전까지 잔뜩 울상이던 Z의 얼굴에 다시금 묘한 생기가 돌았다. 난 그냥 멘붕이었다. 나도 물론 베트남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이렇게 상황이 전개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특히나 비행기를 놓치리라고는 더더욱.

우리는 항공사에 문의해 보고, 내가 구매한 티켓 대행사에도 온라인 문의를 해봤지만, 내게 남은 선택은 곧 출발하는, 내가 산 티켓보다 3배는 비싼 티켓을 사거나 말거나였다.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Z는 멍하니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중인 내 옆에서 계산기를 두들기며, 이 티켓값이면 베트남에서 호화롭게 며칠은 먹고 잘 수 있다 며 친절한(?) 수학적 접근으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진짜 하늘의 뜻인가.



공항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숙소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거짓말처럼 비가 갰다. 우리 사이엔 정적이 흘렀지만, 나는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결말이 예상되는 뻔한 드라마에서 뜻밖의 새로운 전개가 시작될 때의 느낌이었다. Z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더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호찌민에서 약 2시간 반정도 거리의 붕따우라는 섬에 놀러 가자. 베트남에서 해변이라곤 유령 도시 동허이의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똥물 바다만 잠깐 거닐던 기억뿐이었는데, 섬, 해변, 바다라는 단어에 단박에 GO를 외쳤다.

내 인생의 강력한 터닝포인트가 우연히 호스텔에서 만난 인연으로 실현되는 것이 신기했고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날 난 우연에 기대어 의미를 찾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짓인가를 깨달았어야 했다.

평화로운 섬 풍경 속에서 처음 배운 오토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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