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곳에 낙원은 ‘있’다

by 주비

붕따우 섬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가는 길. 내 몸은 붕 뜬 것처럼 현실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대로 비행기 티켓을 샀다면 난 오늘 한국에 있을 텐데.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붕따우로 출발하기 전 숙소는 2박만 예약해 두었고, 한국행 티켓은 좀 더 이 순간을 즐기다 고민해 보기로 했다.

호찌민에서 약 2시간 정도 거리의 항구 도시인 호찌민은 한때 프랑스 식민지 마을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 특히 은퇴한 호주, 미국인 노부부가 휴양을 즐기러 오는 해변 휴양지다.


도착한 붕따우는 호찌민의 정신없음과는 반대로 너무 여유로운 섬이었다. 푸른빛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며 뻥 뚫린 도로를 오토바이로 달리니 놓친 비행기 값 정도는 하나도 속상하지 않았다.

붕따우 해변



호찌민의 빽빽하고 매연 가득한 오토바이 도로와는 정반대인 이 곳 덕분에, 나는 오토바이 운전을 해볼만 하겠다는 배짱이 생겼다. 처음 시작은 주차장부터. 간단한 작동법을 배우고 주차장을 뱅뱅 몇 바퀴 돌았다. 자신감이 붙었다. Z는 나를 말렸지만, 바로 도로로 나갔다. 우리의 운전 수업을 구경하던 아저씨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자신감이 더 붙었다. 80kg이나 되는 Z를 뒤에 태우고 해변을 따라 도로를 달렸다. 난 아마 타고난 레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매일같이 베트남의 뙤약볕 아래 더운 바람을 맞으며 오토바이를 타니, 내 피부는 빨갛고 까맣게 아주 잘 익어갔다.


이틀만 지낼 예정이었던 붕따우 섬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그동안 나는 정말 많은 경험을 했다. 그 경험들이 나를 너무 행복하게 했다. 설령 여기서 안 좋은 일을 겪더라도, 우린 비행기 놓친 것만 하겠어? 이것도 나중에 우리만의 에피소드가 되는 거야 라며 호탕하게 웃어넘기게 됐다.

나는 오토바이를 처음 운전해 봤고, 새로운 음식들을 먹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밤새 얘기를 나눴고, 바다에서 처음 수영해 봤다. 처음인 것 투성이었기에 오랜만에 맛보는 극강의 행복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난 이제 오토바이 운전할 줄 아는 여자


새로 맛본 다양한 음식들


맥주병을 든 NPC들이 늘 있는 킹콩바


붕따우 섬은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젊은 사람보다는 나이 드신 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숙소 앞에 있는 펍에는 늘 맥주병을 한 손에 들고 여유를 즐기는 배 나온 아저씨들이 게임 속 NPC마냥 앉아있었다. 이곳에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또 내 세계관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나는 다시 돌아가야했다. 하지만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는 결심이 함께였다. 더욱이, 만료가 코앞인 여권도 재발급 받고, 더욱 길어질 베트남에서의 여행을 위한 짐도 더 준비해야 했다. 대단히 충동적이고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난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이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난 다시 한국행 티켓을 예매했다. 이번엔 예매하는 동안 날짜만 10번은 더 확인했다.


붕따우에서 호찌민으로 향하는 배


참으로 타이밍 좋게 호찌민으로 향하는 배에 탑승하자마자 폭풍우 치듯 거센 비가 내렸다. 예상대로 Z는 가지말라는 하늘의 뜻이라는 단골 멘트를 했다.

그렇게 붕따우에서 행복한 일주일을 보내고, 나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체크인 시간이 다가오자 Z는 애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만난지는 2주뿐이었지만 마치 2달을 함께한 것 같았다. 그만큼 서로에게 많은 시간을 쏟았기 때문이다.


호찌민아 안녕


그렇게 나는 디지털 노마드를 도전해 보겠단 그럴듯한 대외용 이유와, 삐끗하면 낙오자로 찍히는 한국을 벗어나 끝까지 해보겠단 반항심, 그리고 하루빨리 남자친구와 함께 하고 싶단 대단히 감성적인 이유로, 관광비자 서류의 잉크가 마를 틈 없이 다시 베트남으로 떠났다. 취미로 몇 년간 운영하던 블로그와 내 전공 디자인을 살려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면 무리 없이 외국, 특히나 물가가 저렴한 베트남에서 충분히 생활이 가능할 거라 쉽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모아둔 돈이 있으니 최악의 상황은 그 돈을 다 쓰고 돌아오는 것뿐이지, 결국 나에겐 돌아올 곳이 있다는 안정감이 있었기에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베트남 다낭으로 다시 입국했다.


다낭에서 보낸 생일


나는 갓 외국에 살게 되서인지 조금은 들뜬 상태였다. 늘 낙오자가 되면 안 된다는 강박에 무엇이든 열심히 했음에도 불안함에 허우적거리던 피로한 인생에서 벗어난 이런 경험은, 특히나 여행에서 만난 운명 같은 남자친구와의 모험은 무척이나 신선했다. 와의 여정이 한 편의 영화 같았고, 여느 영화처럼 해피 엔딩이 기다리겠지란 막연한 생각을 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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