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 걸러 독립유공자가 있는 마을
달도 보이지 않는 밤이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용대의 사랑채로 모여들었다. 가슴팍에서 고이 접은 종이 한 장을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꺼냈다. 기미독립선언서다. 모두들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종의 인산일에 맞춰 서울에 갔던 마을 사람들이 3.1 운동을 보고 함안에서도 거사할 것을 계획하는 순간이었다.
군북장날까지는 보름이 남았다.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하기에는 긴 시간이다. 그러나 준비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짧다. 5일 후 백이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인근의 서산서당으로 모였다. 거사의 본부다. 마을 위쪽의 원효암에서 산대를 꺾어 만든 깃대로 원효암과 서산서당 다락방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장날 사람들에게 뿌릴 기미독립선언서는 신창야학에서 등사기를 돌렸다. 모두들 말을 아끼고 조심스러운 몸짓에서 긴장감이 돌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3월 20일 나무지게와 장보따리에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를 숨겨 군북 장터로 한 명 한 명 모여들었다. 사전연락을 받은 사람들, 혹시나 해서 장을 찾은 사람들로 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만세소리가 함안을 뒤흔들 때 수적으로 밀리던 일경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함안의 3.1 독립운동가로 확인된 52명 가운데 사촌리 주민이 14명이나 된다.
처음 모임을 가졌던 조용대 사랑채는 6.25 때 불타서 지금은 감나무 밭으로 변했고, 순절한 분들을 기리는 안내판만 드물게 있을 뿐이다. 태극기를 만들었던 원효암과 의상대는 원래의 전설로 되돌아가 불심이 두터운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하러 온다. 은행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서산서당은 어계 조려 선생의 미천제를 여는 삼월 중정일에 딱 한 번 북적이는 손님을 접대하고는 홀로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선돌 – 신선들의 연애 터였나?
군북역에서 사촌으로 가는 길은 신비롭다. 바스락 거리는 5월의 태양을 받아 농사일이 한창이다. 의산삼일로 양 옆에 펼쳐진 넓은 들을 치바다들이라고 부른다. 남강제방이 없던 시절 큰 물이 범람하면 소포리까지 물에 잠겼으나 이곳까지는 물이 침범을 못했다고 한다. 범람이 없는 땅은 안전한 수확을 보장했고 조상들은 이 땅에 무사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동촌에는 고인돌이 늘려있다. 논 가운데 혹은 비닐하우스에 커다란 돌이 딱 붙어 있다. 고인돌 주변에 기계가 가지 못해 보리 이삭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농민들의 노고를 알 것 같다. 수천 년 동안 저렇게 밭을 갈고 논을 갈아 누대를 살아왔을 것이다.
사촌에는 모두 4기의 선돌이 있다. 탕건바위, 신선바위로 불리면서 소형이지만 전설을 간직한 채 아직도 온전히 보전되고 있다. 특히 함안읍성으로 통하던 옛 길가에 산신령이 앉아 쉬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2기의 선돌은 모양이 특이하다. 독립유공자 후손 이상찬 씨의 마늘 밭 가에 할매산신령이 앉아 쉬었다고 알려진 암돌이 있고, 할배산신령이 앉았다는 숫돌이 옛 선인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숫돌은 담벼락에 서 있다 지난해 큰바람이 불어 쓰러졌는데 세우 지를 못해 옆으로 누워있다. 두 신령이 마주 앉아 차를 마셨을까? 젊고 잘생긴 산신령의 전설이 없어 안타깝지만 할매 할배 산신령도 이 선돌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연애를 했다고 믿고 싶다.
삼신산과 광산이 있어 풍요로웠던 마을
- 개도 지전을 물고 다녔다!
삼신산은 사촌을 둘러싸고 있는 상데미산, 골새미산, 북데미산을 일컫는다. 이런 산들 사이의 분지에 형성된 마을이 사촌이다. 동북간의 북데미산을 넘으면 가야읍 춘곡리와 혈곡리와 연결되고, 동남간을 넘으면 함안면 파수리 고심이가 된다. 예부터 사촌은 진주로 통하던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고을 원이 진주목으로 행차할 때 이 지름길을 통해 진양군 성전암을 거쳐 진주로 갔다. 1914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랑목 또는 사랑산으로 불려졌으며, 아직까지도 사랑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마을이다. 사촌은 산골이라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기 때문에 벼농사 이외의 다른 작물은 재배하기 어렵다. 그래서 흔한 비닐하우스도 드물다.
신촌을 지나 오곡으로 가면 광산촌이 있다. 1970년대 까지 구리 광산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모두 폐광이 되고 한 곳은 굴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 때문에 사람들에게 얼음골로 알려져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사촌은 광산촌과 가까운 비교적 큰 마을로서 광산과 더불어 큰 호황을 누렸다고 했다. 광산에서 흘러나오는 자본들과 광산노동자들의 생활편의시설까지 담당하면서 사촌의 경제는 활기를 띠고 좁은 마을이 북적거렸다. 그러나 광산이 폐광되면서 광산과 얽혀있던 사람들이 떠나고 다시금 조용한 농촌마을로 돌아갔다.
조 씨와 김 씨가 오랜 세월 뿌리를 내린 씨족마을이어서 그런지 마을 내에 재실이 세 곳이나 있다. 작은 마을이지만 박사도 많고 검사나 판사도 많단다. 작가도 있고, 학자도 있는 마을은 점차 늙어가지만 여전히 풍요로운 땅이 있고 다정한 이웃이 있고,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나무들과 더불어 행복한 미소로 여유를 즐기는 어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