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내정과 시용 그리고 수습사원
근로관계는 사업주와 노동자가 합의만 하면 그 즉시 성립된다. 요건 충족, 관계 형성, 효과 발생이라는 법적 행위의 흐름을 기준으로 고용을 보자. 개개의 근로 조건에 사업주와 노동자가 동의하면(요건 충족), 근로관계가 발생하고(관계 형성), 노동자는 노동을 제공할 의무를 사업주는 임금을 지급할 의무를 진다(효과 발생). 이 세 가지 요소는 동시에 발생한다. 예컨대 내가 마트에 가서 진열되어 있는 물건을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는 순간, 마트와 나 사이에는 채권, 채무 관계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나는 대금을 지급할 의무를, 마트는 물건을 제공할 의무를 진다. 물리적 시간을 기준으로 보자면 물건을 올려놓는 행위 후에 계산이 끝나고 점원에 의해 제품이 제공되기까지 수 초 내지 수 분이 소요되지만, 현실적으로 물건을 건네주는 것이 채무의 이행은 아니다. 관념상으로 요건 충족, 관계 형성, 효과 발생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런데 근로관계에 있어서 이것이 이시(異時)에 일어나는 전형적이지 않은 계약이 채용내정과 시용이다.
채용내정은 근로계약에 관한 의사합치가 있은 지 수 일 내지는 수개월이 지난 후에 실제로 노동을 제공하기로 한 계약을 말한다. 채용내정은 비전형계약으로 불리지만 실무에서는 오히려 흔한 계약의 모습이다. 일례로 삼성전자는 2023년 상반기 공채 일정을 6월에 마무리하고 합격한 인원을 8월에 입사시킨다. 따라서 최종 합격한 사람은 6월에 채용내정된 상태로 추가적인 결격사유 없이 8월이 되어야 실제로 근로를 제공할 수 있다. 근로계약은 낙성, 불요식 계약으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사용자와 노동자의 의사합치만 있으면 성립된다. 따라서 추가적인 서류를 제출하거나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등의 절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부수적, 형식적인 것이다. 삼성의 예로 돌아가자면 2023년 6월 최종합격하면 근로계약은 성립된다.
근로계약이 체결된 이상 사용자라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근로계약을 종료(해고)시킬 수 없다. 대법원 판례(2000다51476)를 근거로 채용내정 시부터 정식발령일까지 사용자에게 해약권이 유보(留保)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의문이다. 해약권이란 자유의사에 따라 (보통은 일정한 손해를 감수하고) 적법하게 체결(또는 지속 중인)된 계약을 해제(내지 해지)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그런데 위 판례에서는 경영상 이유에 의해(IMF 사태) 해고 회피의 노력(피고 회사 현대전자산업 주식회사는 1998년 한 해에만 4000명 이상이 명예퇴직 및 의원사직 하였다)을 다한 후에 근로기준법에 따라 채용내정자를 해고하였기 때문에 이 판례만을 근거로 해서 해약권이 유보된 계약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채용내정자는 실제로 근로를 제공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근로관계에서의 밀접도가 통상의 근로자에 비하여 떨어진다'는 이유로 기존의 노동자보다 우선적인 정리해고 대상자로 선정될 수 있다. 다만 그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경영상 해고의 요건(재직자 동의 요건 제외; 경영상 해고를 하기 위해서 사용자는 해고의 방법과 기준에 대해 노동자 대표와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조건)을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만약 정당한 사유 없이 채용내정자에 대해 채용내정을 취소하면 이는 채용내정자의 기대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에 해당한다. 따라서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손해배상(2000다25910)을 해주어야 한다. 또한 실제로 노동을 제공하지 않아도 예정된 채용내정일이 지나면 임금지급 의무가 발생한다(2000다51476).
시용계약은 근로계약을 체결한 후 실제 근로까지 나아갔으나, 노동자의 업무능력, 자질, 인품, 성실성 등 업무적격성을 관찰하기 위한 기간(시용기간)을 두고, 시용기간 동안 지켜본 바 업무에 적합하지 않음이 판명되면 시용기간 만료 시 본계약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사용자에게 해약권을 유보한 계약을 말한다. 다만 이렇게 유보된 해약권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하여 사회통념상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사유가 존재해야 한다.
시용계약은 근로계약서에 시용계약이 존재함과 그 기간을 명시하여야 한다. 노동자 모두가 적용을 받는 취업규칙에 '신규 채용되는 자에 대하여 시용기간을 둘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별 근로계약에 시용여부와 그 기간을 명시하지 않으면 시용계약이 아닌 정식 근로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본다.
노동자의 동의에 의해 시용계약이 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앞서 말한 사회통념상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본채용을 거부할 수 없다. 시내버스 운전자가 시용기간 중 앞차를 추돌하여 승객들이 다치고 차가 파손되었다면 본채용에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한 사례가 있다(87다카555). 또한 허위경력 내지 경력은폐사유가 발견되면 이를 이유로 본채용에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다(94다14650). 반대로 최초 채용 시 요구하지 않았던 '2년 이상 운전경력증명'의 제출을 요구하고 이를 제출하지 못하자 본채용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위법하다고 보았다(2003다50580). 한편 사측이 평정등급을 할당해 놓고 무조건 일정 비율 이상을 채용하지 않은 것도 위법하다고 보았다(2002다62432).
시용제도 자체가 법에 정한 바가 없기 때문에 시용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하지만 노동자의 불안정한 지위를 장기간 지속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실무적으로 3개월을 시용기간으로 정하는 사례가 많고 이를 수습사원의 임금과 연동하기도 한다.
수습사원의 임금은 최저임금법에서 그 하한을 정하고 있다. 최저임금법 제5조 제2항에 따르면 1년 이상의 기간 동안 일하기로 한 노동자에 한하여 최장 3개월까지 최저임금의 90%를 지급할 수 있다. 다만 단순노무업무(건설 및 광업 관련 단순 노무, 운송 관련 단순 노무, 배달원, 제조 관련 단순 노무, 청소 및 경비, 가사 및 육아 도우미, 음식 관련 단순 종사자, 판매 관련 단순 종사자 그리고 농어업 관련 단순 노무직 등)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경우라도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지급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