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으로 시작해서 논문으로 끝내기(4)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를 가장 잘 설명하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표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그것보다 훨씬 큰 담론discourse을 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ca Nicomachea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상 분배함에 있어서 동등한 사람들이 동등하지 않은 몫을 받거나 혹은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받는 때에, 거기로부터 싸움과 불평들이 일어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ca Nicomachea 5권 1131a15-24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원칙은 부나 명예 따위의 분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교정, 교환, 준법에 다 다른 원칙이 적용된다고 하였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정의에 대한 논의가 점점 일원화되어간다. 아마 자본이 모든 것을 잠식하면서 자본은 전경으로 나머지는 배경으로 밀려난 탓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는 이런 법적인 사유를 하는 것과 그것을 도구화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면 그 속성에 크게 반하지 않는 한 같은 원칙이 적용되기를 희망하고,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 다름을 근거로 하는 차이를 인정하려고 한다. 아직까지 우리의 정의에 대한 담론은 그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이것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주장은 찾기 어렵다. 거의 모든 철학적 사유는 이 전제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볼 것이냐', '다른 것을 어떻게 대우할 것이냐'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유치권과 항변권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유치권이 존속되어야 할 하나의 이유는 사라진다. 그리고 여기서 또 다른 차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동산과 부동산의 차이가 그것이다.
실체가 있는 사유재산은 모두 동산과 부동산으로 분류할 수 있다. 토지와 그에 정착된 물건은 부동산이다. 토지, 건축물, 기타 공작물 등 말 그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부동산이다. 그 외에 형체가 있는 모든 물건 및 전기같이 관리가 가능한 자연력도 모두 동산에 포함된다.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재산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차이점이다. 우리 민법이 움직일 수 있느냐 아니냐를 두고 재산을 양분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움직일 수 있는 재산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인으로 추정된다. 이건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너무 당연한 추정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부동산은 가지고 다닐 수 없는 재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등기가 된 사람'이 주인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부동산 등기부등본이라는 것은 '이름표'를 국가가 관리하는 것 정도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다.
이렇게 '휴대 가능성'에 따라 동산과 부동산은 많은 것이 달라진다. 동산은 매매계약을 체결한 후에 전(前) 주인으로부터 '건네받으면' 소유권이 달라지고, 부동산은 매매계약을 체결한 후에 '등기'하여야 소유권이 달라진다. 물건을 담보로 돈을 빌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어떤 물건을 담보로 돈을 빌리고자 할 때 동산은 '건네주어야' 하고(전당포를 생각해보자), 부동산은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이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등기하여야 한다. 법적인 용어로 전자는 질권(전당포에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것)이라 하고, 후자는 저당권(내지 근저당권)이라 한다.
같은 논리로 생각을 해보자. 물건에 대하여 받을 돈이 있는데, 그 물건이 동산이라면(앞의 예에서 '와이셔츠'라면) '건네주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그 물건이 부동산이라면 건네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등기'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고의 확장에 따른 당연한 결론이다. 그러니 동산에 대해서만 유치권을 인정하거나, 동산의 경우는 비교적 소액이니 독자적인 권리가 아니라 항변권 정도로만 머물러도 큰 문제는 없다. 그냥 '와이셔츠에 대한 세탁비를 주지 않았으니 와이셔츠는 아직 주지 못하겠다'라는 것과 유치권을 독자적으로 인정하는 것 사이에 법적인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부동산에 대해 건물을 짓고 나서 '돈을 못 받았으니 건물을 못 주겠다'가 아니라 '돈을 못 받았으니 건물에 근저당을 설정하겠다'로 가는 것이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부동산은 등기를 하여 국가가 관리하는 이름표(누구든 볼 수 있다)에 권리를 적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심지어 민법 제666조에는 건물을 지은 사람이 '신사적'으로 건물에 저당권을 설정할 수 있는 권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면 왜 그런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유치권을 행사하는 걸까? 말하지 않았나? 그야 법보다 주먹이 가까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