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요?
의뢰인 A의 첫인상은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나와 같은 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활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녀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고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남편의 친형은, 그러니까 그녀 기준으로 보자면 아주버님, '조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녀가 상속받은 모든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사망 보험금으로 산 건물에는 자신의 지분을 슬쩍 얹었다. 그리고 조카가 성인이 되면 그 지분은 돌려주겠다는 특약도 넣었다. '참 좋은 큰아버지'였다. 그리고 형제가 동등하게 공유하고 있던 토지는 본인이 마음대로 사용을 했다. '참 좋은 아주버님'이지 않은가? 너무 좋은 아주버님이라서 부담스럽다는 것이 A의 생각이었다. A는 공유(공유라고 쓰고 단독 사용이라고 읽자) 토지를 그냥 갈라서 가지고 싶다고 했다. 상속인으로서 당연한 요구였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들었다. 같은 설명을 계속 요구해도 '어디 적으시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반복해서 설명을 해줬다. 소송 자체에 큰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아주 사소한 문제라면 상대방이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였으니까. 상대방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반대로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나는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다. 상대방은 A의 아주버님이지 내 아주버님은 아니지 않은가? 그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듣는다고 해도 나는 어떤 정신적인 충격도 받지 않는다. 남의 평가에 신경 쓰기엔 이 일을 너무 오래 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요소가 하나 있었다. 상대방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착한 사람'이었다. 집안일이니 어느 정도는 욕받이를 할 각오로 나갔지만 언제나 현실은 기대 이상이다. "남의 집안을 망치는 변호사"라는 말을 할 정도로 대놓고 상대방 변호사에게 폭언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도 조정이 진행되는 법원에서 저렇게 말하는 것은 웬만한 배짱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다.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그런 정도로 정신적 충격을 받는 사람은 아니다. "양심도 없이 어떻게 이런 사건을 수임해서는"이라고 그 착한 사람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조정위원이 폭발했다.
아주 착한 상대방의 긴 '훈화'를 잘 듣고 있다가 조정위원의 고성에 오히려 깜짝 놀랐다. 속으로 '오늘 저녁엔 뭘 먹지'라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성이 들리니 놀랄 수밖에 더 있겠나. 조정은 완전히 파행으로 치달았다. 그래도 조정위원은 조정이 성립되도록 노력하는 편인데, 과도하게 나에게 감정이입을 해주시니 감사하기도 했지만 '저러다가 너무 편파적이라고 컴플레인을 들으면 어쩌시려고'하는 걱정도 들었다. 나는 정말 괜찮은데. 하긴 조정위원도 변호사이시니 그런 PTSD 하나쯤은 가지고 계시지 않을까?
사실 상대방은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었다. 그는 A가 원하는 대로 소송을 마무리하면 안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상대방 변호사가 새파랗게 어린 친구라도 사과할 건 사과하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새파랗게 어린 변호사'에게 전화를 한 '착한 사람'의 목소리는 한껏 누그러져 있었다.
"변호사님, 아깐 정말 죄송했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나는 짐짓 정말 상처받은 척 말했다.
"그래도 그런 말씀은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어린 친구가 건방지게 말이다. 내가 말을 하고도 놀랐다.
"맞습니다. 제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A에게 말 좀 잘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어차피 결정은 당사자가 하는 것이니 저는 전달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변호사님."
크게 더 할 말이 없어서 간단한 대답을 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사과한다고 전해줄 것 같은가? 메롱.
그런데 진짜 배가 고프다. 저녁 뭐 먹을 것인지 착한 사람 덕분에 생각을 마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