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 원짜리 막도장과 3천만 원

가난한 셈법

by 진우

나는 회사에서 제공해 준 숙소에 살고 있었다. 숙소에는 음식과 청소, 빨래 등 모든 집안일을 해주시는 이모님이 계셨고, 함께 사는 직원들이 이모님의 월급과 식비, 관리비 등 제반 비용을 공동으로 부담했다. 대략 월 3~40만 원 내외. 그 돈만 내면 강남 논현동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서울에 연고도 거처를 구할 여력도 없던 내게는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우리 회사는 본사가 을지로, 공장이 부산에 있었기에 부산에서 발령받아 올라온 선배들이 꽤 많았다. 2~3년 차 선배부터 팀장급, 심지어 임원까지 한 건물에서 살았다.


숙소 생활 1년 즈음. 간사하게도 감사한 마음보다는 여러 선배들과 부대끼며 느껴지는 불편함, 24시간 노출되는 사생활, 그리고 다달이 나가는 3~40만 원의 고정 지출이 아깝다는 생각이 늘어가던 참이었다. 평소 내가 동경하던 선배, K와 룸메이트가 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내 눈에 K는 완벽한 인간이었다. 명문대 졸업장과 목사, 교사인 부모. 그런 든든한 배경에서 배어 나오는 여유로운 태도. 나와는 완벽히 대척점에 있는 그 구김살 없는 모습은 내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평소 K는 내게 잘해줬다. 밥도, 술도 잘 사주었고 유머 감각도 뛰어났다. 같은 조기축구회 활동을 하며 나는 진심으로 K 같은 선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 늦은 주말 저녁, K는 내게 치맥을 사주며 은밀하게 제안했다.


"진우야, 숙소비 아깝지 않냐? 형이 월세랑 공과금은 다 낼 테니, 넌 보증금만 대라. 너만 좋다면 내가 좋은 곳으로 알아볼게. 꼰대들이랑 같이 지내는 거 불편하잖아. 나가자, 둘이."


그리고 며칠 뒤, K는 내게 문자를 보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반지하 투룸. 보증금 3천만 원에 월세 42만 원]


내가 보증금 3천만 원을 내면, K가 매달 월세와 공과금을 전부 부담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명백한 이득이었다. 스스로는 제법 이성적인 어른이 되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평생 부모님이 번듯한 부동산 거래를 하는 것을 본 적 없는 내게, 계약서의 본질이나 권리관계에 대한 감각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그저 눈앞의 얄팍한 계산표와 '친한 형'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에 기대어 전 재산을 내어준, 뼈저리게 무지한 존재였다. 나는 1년 동안 악착같이 부은 적금을 깨고, 생애 처음 신용대출까지 끌어모아 기어코 3천만 원을 만들었다.


그렇게 입성한 논현동의 반지하 투룸. 나는 비록 반전세일망정 강남땅에 내 공간이 생겼다는 자부심에 우쭐했다. 입주하는 날, 인자한 인상의 K의 어머니가 찾아와 아들을 살뜰히 챙기고 처음 보는 내게도 살갑게 대해주셨다. 그 따뜻함이 부러웠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서울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보러 올 만큼의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줄 든든한 형이 있었으면 했던 내게, K는 친형이나 다름없었다.




행복과 착각의 유통기한은 길지 않았다. 어느 날,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집주인의 전화 한 통이 모든 것을 박살 냈다.


"이진우 씨 맞죠? 세 달 치 밀린 월세는 언제 입금할 겁니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월세는 K 형이 내고 있는데요."

"무슨 소리예요. 입주한 다음 달에 K 씨가 사정이 급하다며 보증금 1천만 원으로 내리고 월세 72만 원으로 계약서 다시 써갔잖아요. 그러고는 내내 연락 두절인데. 보증금 까먹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당장 216만 원 입금 안 할 거면 이번 주 내로 방 빼세요."


뒤통수를 몽둥이로 후려 맞은 듯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K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 끝에 음성 메시지로 넘어갔다. 곧바로 집으로 달려가 굳게 닫힌 선배의 방문을 열었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주인을 잃은 방 안을 찬찬히 훑어보던 내 시선이 책장 한구석에서 멈췄다. 수백 장의 꽝 난 스포츠토토 용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완벽하게 설계된 사기극의 전말이 그제야 명확해졌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내 방으로 달려가 임대차 계약서를 찾아 펼쳤다.


[임차인: K / 동거인: 이진우]


특약 사항에 적힌 내 이름 석 자 앞에는 '공동 계약자'가 아닌 '동거인'이라는 단어가 조롱하듯 박혀있었다. 보증금에 대해 법적으로 단 1원의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언제든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는 투명 인간. 내 전 재산 3천만 원이 걸린 계약서는 내가 모르는 사이 완벽하게 위조되어 있었다.


다음 날 회의실에 끌려온 K는 고개를 처박고 진실을 토해냈다. 그가 동네 문방구에서 3천 원을 주고 판 내 이름의 막도장과 조작한 위임장으로 피 같은 내 돈을 집어삼켰다는 사실을. 2천만 원은 이미 그의 도박 빚과 유흥비로 공중분해 된 지 오래였다.


알고 보니 K는 대학 시절 주식 선물옵션으로 대박을 터뜨렸던 쾌락에 절여진 중증 도박 중독자였다. 그가 대학생일 때 몰고 다녔다고 뽐내던 BMW 미니도 그때의 전리품이었다.


과거에도 사내에는 그의 도박 빚에 얽힌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사건이 터지고 난 뒤, K의 입사 동기였던 한 선배가 고개를 떨구며 털어놓은 진실은 내 남은 이성마저 부숴버렸다. K는 나와 반지하 방의 계약을 맺기 직전, 그 선배를 찾아가 '진우에게는 내 과거를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라고 철저히 입막음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우연히 걸려든 불쌍한 후배가 아니었다. 도박 자금이 필요했던 포식자가 작정하고 고립시킨, 완벽하게 설계된 사냥감이었다.


"진짜 미안하다. 당장 공증 써줄게. 한 달 안에 무조건 다 갚는다."


그 순간에도 나는 그 종이 한 장에 기대어 바보처럼 안도했다. 하지만 법적 효력 따위 없는 종이 쪼가리는 당연히 내 돈을 찾아주지 못했다.


텅 빈 반지하 방에 홀로 남겨진 밤.

통장 잔고가 '0'이 되었다는 절망보다 나를 더 옥죈 것은, 이 비참한 현실을 세상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다는 고립감이었다.


'엄마, 나 3천만 원 사기당했어.'

그 흔한 투정 한 번 부릴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의 무능한 아버지는 그 핑계로 술을 더 퍼마실 것이고, 평생 돈에 쪼들려 온 엄마는 가슴을 치며 울기만 할 테니까. 서울의 밤은 지독하게 처참했다.


나는 대단한 걸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한 달에 3, 40만 원씩 나가는 고정 지출을 어떻게든 줄여서, 단 1년이라도 빨리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K는 그런 내 절박함을 정확히 꿰뚫었고, 악착같이 모은 내 이십 대의 전부를 가볍게 씹어 삼켰다.


단돈 몇십만 원 푼돈을 아끼려다 모은 돈도 날리고, 대출 빚도 떠안은 밤.

나는 K와의 몸싸움을 상상하며 머리맡에 식칼을 두고 누웠다. 극도의 분노와 눈앞이 새까매지는 막막함 속에서 며칠 밤을 허우적댔다.


나는 내 돈을 찾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했다. 경찰서 문을 밀고 들어가 사기죄로 고소장을 접수했고, 집주인에게는 단호한 문장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합리적이고 법적인 조치를 쥐어짜 냈다.


그 치열한 발버둥의 결과, K는 법원으로부터 5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나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 완벽한 합법적 승리 앞에서 나는 철저히 무너지고 말았다. 국가가 K에게 물린 500만 원의 벌금은 가해자를 향한 죗값일 뿐, 내 통장으로 돌아오는 돈이 아니었다. K의 이력에 전과자라는 낙인을 찍었지만, 내 이십 대를 갈아 넣은 3천만 원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경찰도, 법도, 내용증명도 사기꾼을 처벌할 수는 있어도, 멍청한 셈법으로 날려버린 내 전 재산을 구원해 주지는 못했다. 합법적 방법을 모두 동원해 싸워 이기고도 나는 단 1원도 되찾지 못했다.


법적으로 승리자가 된 그날, 나는 비로소 완벽하게 파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