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평짜리 안식처
사기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직후, 당산동의 낡은 원룸으로 도망치듯 이사를 가기 전이었다.
퇴근 후 회사 근처 식당에 마주 앉았지만, 입에 넣은 밥알은 모래처럼 까끌거렸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그녀에게 내 인생의 가장 치욕스러운 밑바닥을 던지듯 털어놓았다.
"나... K한테 사기당해서 대출받은 3천만 원 다 날렸어."
고백이 떨어지고, 식탁 위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숟가락을 든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식은땀이 밴 손바닥만 허벅지에 문질렀다. 실망감에 찬 한숨이 들려오거나, 왜 그렇게 멍청했냐는 질책이 쏟아져도 할 말이 없는 순간이었다. 부모에게조차 나는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평생 돈에 쪼들린 엄마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을 것이고, 무능한 아버지는 자식의 불행을 핑계 삼아 또 술을 퍼마셨을 테니까. 나보다 무능한 사람들. 내게 가족이란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내 예상을 깨고, 숨 막히는 침묵을 가른 것은 거친 숨소리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보다 더 억울해하던 그녀는 급기야 휴대폰을 꺼내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식당 한가운데서 사기꾼을 향한 날 선 쌍욕이 날아갔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오직 나만을 위한 타인의 분노였다.
수화기 너머로 당황한 K의 본색이 드러났다.
"너! 나중에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어."
K가 그녀를 협박하는 소리가 들려온 순간이었다. 반지하 방에서 식칼을 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나였지만, 그때는 달랐다.
"너 진짜 만나면, 나한테 뒤질 줄 알아라. 조심해라.!!!!!!"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던 겁쟁이 소년이, 처음으로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이빨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전화가 끊기고, 씩씩거리던 그녀는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오빠, 너무 낙담하지 마. 나도 오빠만큼 월급 받고, 돈 잘 모으는 사람이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 같이 결혼 준비 잘하자."
그녀의 말은 흔한 위로가 아니었다. 명확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이었다. 무능한 아버지가 술병 뒤로 숨어버렸을 그 절망의 순간에, 그녀는 자신의 월급을 내 빚의 상환표에 올려놓으며 기꺼이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녀가 내민 단단한 두 손을 동아줄처럼 쥐고, 나는 당산역 10번 출구와 영등포구청역 사이, 낡은 5층짜리 상가 건물로 이사했다.
월세 나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나는, 또다시 은행에서 5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대출을 끌어안고 전세 보증금을 치렀다. 다달이 현금이 빠져나가는 '고정 지출'에 대한 병적인 공포. 그것은 사기를 당하고 파산한 뒤에도 내 머리에 깊게 박혀 지워지지 않는 가난의 지독한 후유증이었다.
내가 살던 개미굴은 현관문을 열면 벗어둔 신발 코앞이 밥을 먹는 부엌이자 잠을 자는 침실이었다.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어김없이 세면대에 무릎이 닿았다. 낮이면 아래층에서 아이들의 활기찬 태권도 기합 소리가 올라왔지만, 창문 없는 내 방의 밤은 지옥이었다. 어디서 들어오는지 모를 모기들이 밤새 귓가를 윙윙거렸다 낡은 벽지와 천장에는 수많은 모기의 핏자국이 화석처럼 짓이겨져 있었다.
나는 종종 그 핏자국 아래서 컵라면 하나를 끓여 놓고 싼 막걸리로 주린 배를 채웠다. 사기꾼에게 피 같이 모은 돈을 빨리고, 미물에게 피를 뜯기며 막걸리에 취해 널브러진 내 모습은 때때로 내가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의 패배감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그녀라는 든든한 존재를 얻고서도, 나는 밤마다 찾아오는 절망감 앞에서는 어김없이 값싼 알코올에 기대어 허우적대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과거와 완벽하게 다른 것이 딱 하나 있었다.
귓가를 맴도는 지독한 모기 소리에 뒤척이다가도,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 액정이 반짝이며 그녀의 짧은 안부 문자가 도착할 때면, 목 끝까지 차오르던 절망의 수위가 조금은 얕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요동치던 심장이 단숨에 가라앉거나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기적처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빚은 여전히 까마득했고 방은 퀴퀴했으며, 나는 여전히 현실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쥐고 있던 막걸리 잔을 내려놓게 만드는 그 작은 온기 하나. 3평짜리 개미굴의 얇은 벽 너머로, 나를 위해 기꺼이 분노해 주던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모든 것이 해결되진 않았어도, 적어도 오늘 밤은 귀를 틀어막거나 이불속으로 숨지 않아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윙윙거리는 모기 소리 속에서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