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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깨작 Apr 25. 2023

마흔세 살 자전거 습득기

두 번째 수업

최근 본 방송을 기다리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대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지구마불 세계여행’이라는 방송이다. 섬 살이를 하면서도 맨 발로 모래사장을 밟거나, 제주의 여름 바닷물에 들어가 몸을 담가본 적이 없는 나는 타국에서도 당당히 여행하는 그들이 신기했다.  


그러다 문득 ‘너도 하면 되잖아! 네가 무슨『겁쟁이 빌리』도 아니고. 언제까지 안 해본 거 투성이, 못하는 거 투성이로 살 건데?’ 싶은 마음에 “나도 자전거 배워볼까?” 라며 흘러가는 소리를 했는데.


그렇게 다음 날 갑자기 마흔세 살 여자의 자전거 수업이 시작되었다.


내리막길에서 양발을 들고 균형을 잡으며 내려오는 게 신랑 수업의 기본이자 전부. 이 느낌만 습득하면 자전거는 다 배우는 거라며 아이들처럼 5분 안에도 금방 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나는 시큰둥한 척 긴가민가하며 신랑에게 듣고 본 대로 자세를 취했고. 내 모습을 본 신랑은 뒤에서 둘째 아이에게 속삭였다.


“어?.. 음.. 너네 엄마는 오래 걸리겠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첫 수업 후 내린 신랑의 신선한(?) 평가에 무안해진 나는 입을 삐쭉 내밀며 눈을 흘겼다.

“괜찮아, 진짜 괜찮아. 올해 자기 버킷리스트인 거 같아서 배우게 해주고 싶었지. 진짜 별거 아니거든.”


마음을 가다듬고 내리막길에서 세 번째 내려오는데 순간 ‘페달에 발을 올리면 타겠구나’ 싶었다. 물론 발을 올리려던 순간 주눅 든 내 몸이 먼저 제동을 걸었다. 내 발이 페달 근처로 간 것을 본 신랑은 자전거를 잡아주겠다며 뛰어왔다. 5초가량을 신랑에게 의지한 채로 페달에 처음 발을 올려보았다.


‘아 뭐지, 이러다가 나 정말 자전거 배우는 거 아니야?’

‘나는 당연히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인데. 내가 자전거를 탄다고? 이상한데?’


머리부터 겁먹은 나는 오늘은 그만하겠다고 했다. 나무 그늘 아래 자전거랑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자전거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한숨과 실소가 동시에 나왔다. ‘자전거 네가 뭔데? 이게 뭐라고?’


겁 많고 느리고 소심해도,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데 이상하게 몸을 다루는 일에는 예외다. 어쨌든 유년시절 아빠로부터 받았던 첫 수업은 마흔세 살이 돼서야 두 번째 수업으로 이어졌다. 몸치는 그대로인데 35년 만에 마음 치에 아주 미세한 변화가 생긴 셈이다.


얼마 전, 글쓰기 수업에서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게 되었다. 내 인생을 정리할 게 있을까 싶었는데 내 인생 전반에서 슬픔과 희망이 대부분 공존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둘째 아이 출산과 신랑의 암 투병 생활이 함께였다. 10년이라는 엄마의 오랜 암 투병 시간이 대학 첫 강의 시절과 맞물렸다. 신랑의 암 투병이 시작될 때 갑자기 첫 집 장만을 하게 되었다. 어떤 순간에도 일상은 이어지고 있었고,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은 없었구나 싶었다.


결국 항상 완벽히 살고 싶었던 나는 내 힘과 시간을 여러 상황들에 쪼개어 써야 했을 것이고. 자연스레 그 어느 하나도 완벽할 수 없던 나는 매번 내 인생이 못마땅했고 언짢았던 것 같다. 내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순간들이 힘겨웠고 서서히 하나씩 포기한 듯싶다. 서귀포로 내려온 것조차 내 의지가 아니었으니 이곳에 와서 3년가량은 너무 아프고 원망스러웠다.


서귀포를 좋아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원해서 본시험에 합격을 했고 휴직, 복직, 사직까지 하고 나니 이제 나를 제대로 알 것 같고 나와 더 친해진 기분이다.


나를 그만 다그치고 그동안 잘 버텼노라고 쓰다듬어주고 있다. 되레 내 마음에서는 조금씩 희망이 생긴다. 그동안 포기하고 외면해 왔던 것들을 보며 ‘왜 그랬지?’ 둘러보고 있다.


느려도 너무 느린 나지만 두 번째 선생님을 모셨으니 다시 천천히 해보자. 누가 아는가? 자전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누비는 60대 여인으로 ‘세상에 저런 일이’에 나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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