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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에서 Aug 21. 2021

원어민이 쓰는 말

외국어도 자기주도학습으로

이걸 뭐라고 하지?


 외국인 학생들이 생활 속에서 궁금해하는 한국어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특히 단어가 그렇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단어를 물어보는 학생들이 있다.

“선생님, 이거 뭐라고 해요?

학생이 보여준 휴대폰 사진에는 택배 박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있는 비닐이 있었다. 충격을 완화하려고 넣은 스티로폼 조각도 옆에 보였다.  

저걸 뭐라고 하지? 완충재? 쉬운 말은 없나? 나도 모르겠다.

 수박을 살 때 들고 갈 수 있게 노끈으로 엮어 놓은 것. 그걸 뭐라고 하느냐고 물어보는 학생이 있었는데 수박 끈이라고 해도 되는지 자신이 없었다.

“선생님, ‘치’가 뭐예요?”

“‘치’요? 무슨 ‘치’요? 어디서 들었어요?”

“여자 친구하고 카톡 하면 저한테 자주 ‘치’라고 해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자주 하길래 여자 친구가 코웃음을 치는지 궁금하다.

  학교에서 색깔을 배울 때 ‘빨간색’만 배우지만 동대문 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국 학생은 ‘벽돌색’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인터넷 쇼핑을 하다가 색상 선택 단계에서 ‘먹색, 겨자색’을 보고 이런 말도 알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홈쇼핑 채널에서 쇼핑 호스트가 ‘쨍한 컬러’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도 저건 알아들을 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학교에서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만 배워서는 말 못 할 색이 너무 많다.


 원어민 느낌으로


 TV 프로그램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보는데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이탈리아 사람인 알베르토가 “와, 여기 잘 나오네요.”라고 했다. 상황에 맞는 표현을 아주 자연스럽게 써서 놀랐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고 하더니 역시 한국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표현을 안다.

 외국어를 배울 때는 그런 욕심이 생기는 것 같다. 교재에 나오는 표현이나 학교에서 배우는 표현 말고 원어민들이 쓰는 다른 표현을 배워서 원어민 느낌을 내고 싶은 욕심이다.

 원어민이 어떻게 말하는지 잘 관찰해서 성공적으로 그 표현을 쓰면 어떻게 그런 말도 아느냐고 사람들이 놀라 주어서 으쓱해진다. 그런데 그렇게 귀납법으로 외국어를 배워서 쓰면 부작용도 생긴다. 사례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판단해서 쓰다가 안 쓰느니만 못한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얼마 전 길에서 학생을 만났다. 예전에 가르치고 꽤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내 머리를 보더니 “선생님, 파마 치셨네요.”라고 했다.

 파마를 쳤다고?

그 학생은 주재원이라서 직장에 가면 한국인 직원들이 있고 여자 친구도 한국 사람이다. 아무래도 미용실에 갔다 온 누군가가 머리를 좀 쳤다고 말한 것을 들은 것 같다. 파마까지 확대 적용해 버려서 내 머리가 파마를 한 대 맞았다.

 수업 시간에 잠만 자고 수업을 열심히 잘 안 듣는 학생들도 “요즘 한국에서 이런 말을 사람들이 많이 써요.”라고 하면 펜을 잡는다. 다시 팔아도 될 만큼 필기 흔적 하나 없는 깨끗한 교과서에 내가 알려주는 말을 열심히 쓴다. 그런 말은 배워서 쓰고 싶어 한다. 교과서에 크고 선명하게 쓰여 있는 신조어를 누가 볼까 봐 내가 가르쳐 줬다고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작문 시험이나 숙제에도 쓰면 안 된다는 말을 잊지 않고 한다.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아주 예전에 '블락비'가 신인 그룹이었을 때 블락비를 좋아하는 일본인 여학생이 있었다. CD를 100장이나 사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는데 나에게 CD를 주며 오빠들에 대해 설명하던 밝은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어 수업이 끝나고 블락비 기획사 사무실에 가서 블락비 멤버에게 편지를 주는 것이 그 학생의 일과였다. 오빠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열심히 사전을 찾고 나에게 물었다. 자연스럽게 쓰고 말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 한 학기 동안 꾸준히 편지를 쓰고 실력 점점 느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공부하는 것은 큰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외국어는 단계별로 배우면서 실력을 쌓아가는 것이지만 그 과정을 따라가다가 보면 재미가 없고 지칠 때가 있다. 그럴 때 ‘가르쳐 주는 말’ 말고 ‘내가 알고 싶은 말을, ‘쓰라는 말’ 말고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연습한다면 고단한 외국어 학습 여정도 조금은 견딜 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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