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중간고사 성적을 알려줬다. 학생이 근심 어린 얼굴로 자기 점수표를 내밀었다. “선생님..”
성적이 안 좋다. 평균 점수가 70점이 되어야 진급이 가능한데 70점이 안 되고 특히 듣기 점수가 심각했다.
다른 학생도 다가왔다. 쓰기 점수가 매우 낮다. 기말 시험에서 몇 점을 더 올려야 진급이 가능한 건가. 작은 기적 정도는 일어나야겠는데.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한국어 잘하는 법’을 묻는 학생들이 있다. 어떻게 하면 빨리 유창하게 한국어를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묻는다. 말하기를 못하는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 쓰기 실력이 안 좋아서 고민인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듣기를 잘하는 방법이 있는지 등 자신이 취약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한국어 잘하는 법’에 대해 생각하다가 검색창에 ‘영어 잘하는 법’이라고 입력해 봤다. 예상대로 지금까지 몰랐던 전혀 새로운 방법, 세상을 놀라게 할 획기적인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영어를 잘하는 방법은 질문을 한 사람도 알고 있는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어를 잘하는 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질문을 받고 내가 해 주는 대답도 학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나 알고 있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낯선 것이 덜 낯설어지려면 많이 보고 반복해서 연습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이 끝나고 성적이 갑자기 크게 오른 반 아이가 있었다. 아마 반에서 3, 4등 정도를 했던 것 같다. 그전까지 한 번도 상위권에 든 적이 없고 반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에 선생님도 학생들도 다들 놀라워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담임 선생님은 그 아이를 앞으로 나오게 했다. 어떻게 공부하는지 친구들에게 소개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마지못해 앞으로 나와서 주뼛주뼛 이야기한 공부법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집에 가서 그날 배운 것을 복습한다는 것. 선생님은 집에 도착해서부터 밤에 잘 때까지 어떻게 하는지 다시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라고 하셨지만 그 아이의 이야기에는 선생님을 만족시킬 만한 깜짝 놀랄 비법은 없었다.
그때 나는 그 아이의 공부 ‘방법’이 아니라 ‘계기’가 궁금했다. 갑자기 공부를 이전보다 열심히 하게 된 계기가 뭐였을까. 선생님이 계기를 물어봐 주셨으면 했다. 그리고 공부할 마음을 계속 유지하게 된 이유도 궁금했지만 들을 기회는 없었다.
외국인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게 된 계기는 다양하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인기를 끌었을 때 욘사마 배용준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 아줌마 학생들이 있었다.
한국인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와의 연애가 한국어 공부의 계기가 된 학생도 있고 진학이나 취직을 하고 싶어공부하는 학생도 있다.
한국 아이돌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그들의 음악과 춤에 심취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도 많아졌다. 지금 우리 반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BTS의 인터뷰와 노래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온라인 수업 때 학생의 모습 뒤로 벽에 붙은 BTS 사진들이 보인다.
오늘 서점에서 외국어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책들을 구경했다. 공부라는 작업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계가 책이라면 우리 집 책장에는 이미 성능 좋은 기계가 여러 대 있다. 사용법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기계의 스위치가 켜질 만한 강력한 ‘계기’가 부족하고 아주 드물게나마 켜진 스위치도 금세 꺼진다는 것이 문제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영어 책 코너에서 책을 들었다 놨다 하던 나를 내가 말린 것은 잘한 일 같다. 현명한 선택으로 그 책이 책장 디자인의일부가 되는 슬픈 일을 미연에 방지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