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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에서 Oct 14. 2021

언젠가 해야지

 온라인 수업이 되면서 학생들의 숙제는 사진이나 pdf로 받아 확인하게 되었다. 며칠 전 학생의 작문 숙제 pdf에 글자를 써넣느라 눈이 빠질 것 같은데 갑자기 내 눈앞에서 숙제가 사라졌다.

컴퓨터 장치에 문제가 생겼다는 안내와 함께 파란 가을 하늘처럼 내 앞에 펼쳐진 블루스크린.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수업 자료 다 여기에 있는데 망했다.


복구율이 100%로 차오르더니 노트북이 다시 켜졌다. USB와 클라우드를 총동원해서 당장 필요한 수업 자료를 업로드하고 압축해서 신속하게 대피시켰다.

인터넷도 되고 ppt도 열리고 다 되니까 괜찮겠지? 

조심스럽게 숙제 pdf를 다시 열어 떨리는 손으로 타블렛에 두 글자를 쓰자 다시 블루스크린 재회. 노트북이 다시 켜졌을 때 다음엔 안 켜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자료를 다 정리하고 옮다. 언젠가 해야지 하면서 몇 달을 미뤘던  한 30분 만에 끝 났다.


 지난주에 학생이 속초에 다녀왔다고 다. 러고 보니 초를 못 가 봤다. 언젠가 가 보고 싶었데.

외국인 학생들은 여러 곳에 가고 많은 것을 한다. 한국에 있는 기간 동안 많은 경험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는 한국에 살고 있으니 언제든지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더 안 가고 안 한다.  

체류 기간처럼 기한이 정해져 있으면 '언젠가' 대신 '언제까지' 뭘 해야겠다는 계획이 세워진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하고 싶 욕심도 생긴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일본에서 1년 간 살았는데 그때 한국에서 한 번도 안 간 야구장을 두 번이나 가고 등산도 안 좋아했으면서 후지산에 올랐다. 1년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여러 가지를 해 보고 싶어서 부지런하게 살았다.

그렇게 1년짜리 작은 타이머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내 인생의 커다란 타이머가 째깍째깍 돌고 있는 것은 쉽게 잊고 산다. 마치 영생을 살 것처럼 '언젠가 해야지'고 생각한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언젠가 써야지 하면서 넣어 둔 물건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언젠가 정리해야지 하면서 대충 박스에 모아 둔 자료도 있었고 언젠가 읽을 거라고 사 둔 책도 발견했다. 내가 막연히 생각한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는 시간지금 하지 않으면 결국 안 하게 된다.

'-(으)ㄹ까 봐(서)'문법을 사용해서 문장을 만드는 숙제를 냈는데 학생이 이런 문장을 썼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을까 봐 지금 잘 살고 있어요.>


어휘와 문법도 안 틀리고 잘 썼지만 무엇보다 마인드가 훌륭해서 큰 동그라미를 쳐 주었다.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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