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금을 올려 주고 계약 연장을 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냉장고를 팔아야겠다는 거였다. 옷방에 냉장고가 한 대 있다. 지금 사는 집이 빌트인 냉장고인데 냉장고를 팔고 이사 오자니 2년 뒤에 또 사게 될 것 같아 그냥 가져온 냉장고다. 2년을 또 갖고 있기가 싫었다.
당근 마켓 앱을 깔았다. 냉장고는 사진을 올린 지 30분 만에 팔렸고 덕분에 내 옷방은 훤해졌다. 방이 넓어지니 기분이 좋아서 공간만 차지하고 쓰지 않는 것을 더 찾아봤다.
옷방 구석에 돌돌 말린 채 세워져 있는 돗자리. 이사와서 두 번의 여름 동안 펴지 않았으니 팔아도 된다. 사진을 찍고 당근에 올렸다.
며칠 후 돗자리를 사고 싶다는 채팅 메시지가 왔다.
"그런데 돗자리를 먼저 직접 봐서 결정할 거예요"
아, 길바닥에서 돗자리를 펼쳐야 하는 상황인가? 안 판다고 해도 될까?
하지만 돗자리를 펼쳐 보여야 하는 것보다 "직접 봐서"라는 표현에 더 난감해졌다.
이거 많이 보던 건데. 설마 내가 아는 그건 아니겠지?
'-고'를 '-아/어서'로 잘못 쓰는 외국인 학생들이 많다.
느낌이 좋지 않다. 연락한 사람의 위치를 확인해 보니 내가 일하는 대학교 주변이었다.
우리 학교 학생.... 아닐까?
아니야, 한국 사람도 '상황 봐서 결정하겠다, 시간 봐서 연락하겠다' 이런 말 하잖아.
불안한 마음에 자꾸 예를 찾아냈다.
다음 날 돗자리를 펼쳐 보이기 좋게 은행 ATM기 있는 곳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연락한 사람이 나타났다. 돗자리를 펴면서 물었다.
"혹시.. 유학생이세요?"
"네, 맞아요"
중국인 유학생이었다. 학교는 묻지 않았지만 그 위치면 우리 학교에 다닐 것이다. 마스크를 쓰게 된 상황이 고마운 건 처음이었다. 중급 이상인 것 같은데 몇 급 학생일까? 다행히 내가 들어가는 반 학생은 아니지만 나중에 학교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가능한 한 빨리 그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학생은 돗자리가 깨끗하다고 좋아하며 사겠다고 했다.
돗자리를 다시 말며 그냥 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학생인 걸 알고 나니 돈을 받기도 그렇고 그냥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내 신분을 밝혀야 한다. 갑자기 그냥 주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다른 이유가 뭐가 있을까?
이유를 생각하느라 머리도 복잡하고 돗자리를 다시 마느라 바쁜데 사교성 좋은 그 학생은 자꾸 말을 건다.
"요즘 날씨가 너무 덥죠?"
"네?.. 아, 네"
"너무 더워서 돗자리가 필요했어요. 돗자리가 너무 깨끗하네요. 언제 사셨어요?"
잘하네. 조사도 안 틀리고 발음도 좋다.
돗자리를 다시 말아 끈으로 묶어서 주고 돈을 받고 은행을 나와 빠르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길을 건너서 지켜보니 학생은 은행 앞에 세워 둔 공공 자전거 따릉이에 야무지게 돗자리를 싣고 있었다.
'더운날씨에 학교 근처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려면 힘들겠다.내일부터 온라인 수업이 끝나면 저 돗자리에 누워 있겠군.'
코로나로 외부 활동에 제약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모두 비슷해졌다. 외국인 학생들의 생활도 어쩔 수 없이 단조로워졌다.한국은 할 것도 많고 하기도 편리한 나라여서 재미있게, 편하게 여러 가지를 해 보며 지낼 수 있는 곳인데 코로나로 못하는 것이 많아져서 외국인 학생들도 아쉬워한다.
유학을 왔는데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서 학교도 못 가고 온라인 수업은 자꾸 연장된다. 신나게 놀러 다니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시무룩해지고 심심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코로나 시대의 유학은 특별한 경험을 할 기회가 없어지고 일상생활만 남아 버렸다.
당근 마켓을 무리 없이 이용하는 학생을 보고 나니 유학생들이 내 생각보다 한국 생활을 다채롭게 잘하고 있는 듯해서 다행스러웠다.유학생들의 즐거운 한국 생활을 응원한다.
그러나 판매자와 구매자로 만나는 것은 민망하므로 이 동네에 사는 동안 당근 마켓 이용 시 채팅창에 쓴 표현을 잘 확인하고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