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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에서 Sep 07. 2021

롤 플레이: 내가 막내였다면

되도록 많은 역할을

“그건 그렇고 나 전국노래자랑 나온 거 봤어?”

“뭐? 어딜 나와?”

“엄마한테 못 들었구나. 보내 줄게”


동생한테 뭘 물어보려고 카톡을 보냈다가 얼떨결에 유튜브 영상을 하나 받았다.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무대에 올라왔으니 분명 선글라스 쓴 저 여자가 내 동생일 것이다. 매우 불안하다.

 노래가 시작되자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 되었다. 신나는 트로트 노래를 열창하는 보컬 뒤에서 남녀 백댄서가 현란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특히 여자가 심하게 열심히 췄다.

 노래가 끝나고 이어진 인터뷰에서 송해 아저씨가 개인기를 보여 달라고 하자 동생이 냉큼 앞으로 나와서 오랑우탄 흉내를 내며 뛰어다녔다.  얼굴이 자꾸 뜨. 영상은 동생 팀이 인기상을 받고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끝이 났다.

 다시 카톡이 왔다. 몇 주 뒤에 전국노래자랑 연말 결선이 있어 서울에 올라온다고 했다. 아이들은 시어머니나 제부에게 맡기고 혼자 갈 생각이니 우리 집에서 재워 달라고 해서 알겠다고 했다.


 숫기 없는 나와 달리 동생은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고 거침이 없다. 우리 집 막내인 동생은 항상 집에서 재롱을 떨어 식구들을 웃게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

 동생이 막내로 태어나서 그런 성격이 되었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사람들의 인상을 이야기할 때 첫째 같다, 막내 같아 보인다는 말을 한다. 집에서 몇 번째 아이로 태어나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도 성격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누구나 하나밖에 해 볼 수 없으니 알 길이 없지만 내가 막내였다면 과연 전국노래자랑 연말 결선 인기상을 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수업 시간에 말하기 연습을 위해 롤 플레이를 할 때가 있다. 한 명은 손님, 한 명은 점원이 되어서 가격도 묻고 물건도 판다. 롤 플레이를 하면 꽃집 주인도 될 수 있고 카페 직원, 백화점 점원, 의사, 은행원, 부동산 중개사도 될 수 있다. 잠깐이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 볼 수 있다.     

 현실에서도 범죄자만 아니면 되도록 많은 역할을 해 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서 식당에서 음식이 늦게 나와도 재촉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문은 밀리고 손님은 계속 밀어닥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순간들이 생각나서였다.

 재봉틀을 배울 때와 테니스를 배우러 다닐 때는 학생들에게 천천히 설명해 줘야지, 잘했다고 칭찬도 많이 해 줘야지 마음먹었다. 학생이 되어 보니 학생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예전에 주재원 학생의 수업을 할 때 학생이 회의 때 쓰는 말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한국어는 아는데 회사를 모른다. 한 번도 회사를 다녀보지 않아서 회의 분위기도 모르고 회의에서 쓰는 말도 모른다. 내가 아는 회사는 드라마 속에 나오는 회사다. 회사를 다녀 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기업 임원 부인의 수업을 했을 때 생이 사장과 임원 가족이 참석하는 회사 파티에 가게 되었다며 파티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었다.

생일 파티나 가 봤지 그런 파티를 못 가 봐서 한국어로 알려줄 것이 없었다. 막장 드라마에서 파티 장면은 많이 봤는데 참고가 되지 않다.

이번 생에 회사 파티에 초대받는 역할은 못해 볼 것 같다.

     

 며칠 전 카톡의 ‘생일인 친구’ 목록에 동생 이름이 떴다.

맞다, 오늘 생일이지.

동생은 케이크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케이크를 먹게 되면 많이 먹으려고 욕심을 부렸다. 동생의 입맛을 고려해서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 쿠폰을 보냈다.


동생한테서 바로 답이 왔다.

“뭘 또 이런 걸 보냈어ㅎㅎ. 우리 애들 케이크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데. 고마워. 잘 먹을게^^~”


 기분이 좀 이상했다. 동생이 엄마인 것을 내가 잠시 잊었나 보다. 까불거리며 식탐 부리던 우리 집 막내는 어느새 아이들부터 챙기는 엄마가 되어 그 역할을 열심히 수행 중이었다.   

 흔히 자식을 낳으면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한다. 자식일 때 알지 못하던 부모의 마음을 본인이 부모의 역할을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것이 어떤 것인지,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른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자식 역할만 해 본 나는 알기 어려운 부모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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