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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에서 Aug 31. 2021

어디에 살까?

가만있어도2년마다 바뀌는데.

 강릉에 다녀왔다. 다른 여행지는 여행을 가면 여기 좋구나 하고 끝나는데 강원도로 여행을 가면 여기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춘천이 그랬고 양양이 그랬고 강릉은 특히나 그랬다. 옛날에 왜 강원도로 유배를 보냈는지 알 것 같다.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서 한적한 곳으로 다니다 보면 마음이 편해져서 한양에 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겠다 싶다. 나도 1박 2일의 여행이 끝나고 다시 서울에 갈 시간이 되었을 때 가기가 싫었다. 사람 많고 시끄러운 한양 땅에는 가서 무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양에 가지 않고 강릉에서 안빈낙도하고 싶었다.


 막상 강에 살면 심심해서 한 달이면 서울에 오고 싶을 거라 친구는 예언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강릉에는 바다도 있고 호수도 있고 소나무도 많다. 커피도 있고 순두부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게 잔뜩 있으니 여기 살면 행복하겠다 싶은 곳이다.


 예전에 오죽헌을 가 보았으니 이번엔 허난설헌 기념 공원에 갔다. 기념 공원 안에는 기념관과 생가가 있다. 기념관에서 허난설헌과 허 씨 집안사람들의 시를 읽으며 이렇게 경치 좋은 강릉이니 시가 나올 만하다 생각했다.

 전날 경포호 주변을 걸었는데 호수가 햇빛에 반짝거리고 새가 지저귀고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와서 감탄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경포호 안내문 '관동팔경 중 하나이며 정철의 관동별곡에서 정철이 그 경치에 감탄했다'는 말이 있었다. 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성실하게 받았고 심지어 국어도 좋아했는데 관동별곡 경포호 이야기기억이 안 난다. 정철의 관동별곡은 주제와 의미 열심히 외워서 ①~④중에서 정답을 가려 내야 했던 문학 작품일 뿐이었다. 아무튼 경포호가 그 정도로 감탄할 만한 경치라는 거였다.


 경포호 근처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는 작고 소박했다. 이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며 자라서 동생 허균은 홍길동전을 고 누나 허난설헌은 천재 시인으로 인정받았단 말이지. 생가를 둘러보는 것은 항상 신기하다. 옛날에 지은 집이 그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도 신기하고 그 공간에서 우리가 아는 유명한 인물이 생활하며 지내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더 신기하다. 그런데 집 구하는 TV 프로그램 ‘구해줘 홈즈’를 내가 너무 열심히 봤나 보다. 생가를 구경하면서 ‘이 방은 사이즈가 좀 아쉽네. 수납장 놓으면 누울 자리가 안 나오겠는데, 층고가 낮아서 좀 답답해 보이네, 부엌 동선이 불편하겠다.’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다. 집 근처에 호수가 있는 것은 큰 메리트였다. 허난설헌 생가는 호세권에 위치한 단독 주택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바꾸고 싶으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를 바꿔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사는 곳, 읽는 책, 만나는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사는 곳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책 취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만나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세 가지 중에서 무엇이 더 바꾸기 어려운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내가 가르치는 외국인 학생들은 사는 곳을 바꾼 사람들이다. 이야기를 나눠 보면 한국에 온 후 바뀐 것이 많다고 한다. 식성부터 생활 습관과 마음가짐까지 자기 나라에 있을 때와 달라진 것이 많았다. 사는 곳이 바뀌면 많은 변화가 따라온다.


 나는 어차피 지금 사는 서울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자유로운 몸이다.

 사는 곳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읽는 책까지도 바뀔 텐데. 아, 정말 강릉에 살아 볼까? 근데 강릉에서 일을 찾을 수 있을까? 서울로 돌아오는 KTX 기차 안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거의 2년 만에 걸려 온 집주인의 전화였다.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나의 목에서 ‘을의 목소리’가 튀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전세 계약 만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내가 계약 연장을 하고 싶다고 하자 집주인은 사실 집을 팔 생각이라 했다.

 아.. 그럼 난 또 이사 갈 집을 알아봐야 하나.  집이 없는 덕분에 서울에만 있어도 사는 곳을 바꿀 기회가 2년마다 찾아오는데 내가 참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    




 며칠 전 가정 표현 ‘-다면’을 가르치면서 ‘10억이 있다면 뭘 할 거예요?’라고 학생에게 물었다. 학생이 ‘10억이 있다면 집을 살 거예요’라고 대답했을 때 '서울 중심가 아파트는 못 사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10억은 현실이 아닌 것을 가정해 보는 ‘가정 표현’ 연습에 어울 큰돈인데 그 돈으로 집을 못 사는 건 이상하다. 10억도 없지만 있다는 가정 하에도 집을 가질 수 없는 현실이 참 가혹하게 느껴다.

 씁쓸하지만... 부동산 시세에 맞게 다음부터 금액을 좀 더 올려서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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