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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님 Jul 12. 2024

편지

나의 말 03.

  올해 딸아이가 입학을 하면서 새롭게 방을 꾸며주기로 했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요.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은 아니니, 이 마음이 그리움은 아니겠습니다. 길을 걷다 우연히 한 번쯤 마주치는 상상을 해 본 적은 있습니다. 머리가 긴 여중생 두 명이 자기들끼리 무어라 조잘대며 앞서 걸어가고, 당신은 그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오른편엔 단정한 모습을 한 당신의 배우자가 함께 걷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지요. 길을 걸을 때면 손을 잡아주는 대신, 늘 저를 오른편에 서게 했습니다. 급하게 달려오는 차나 오토바이가 위험해 보여, 딸아이와 함께 걸을 때면 길 안 쪽에 서게 하는 습관이 생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어떤 마음이었는지요. 우리는 손을 잡고 걸을 수 없었으니 누군가와 손 잡고 걷는 당신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만, 이제는 마주 잡은 두 손을 가볍게 흔들며 걷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연히 마주치는 그 순간, 저는 어떤 모습일까요? 입술에 뭘 바르지 못했더라도 눈곱이라도 떼고, 머리는 감고 나온 날이기를 바랍니다. 모자를 눌러쓴 채, 김칫국물인지 케첩이 튄 건지 알 수 없는 빨간 얼룩이 남은 옷차림만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당신의 기억 속에 남은 제 모습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요. 우리가 스쳐가는 그 순간, 길 반대편에서 서로가 서로임을 알아채고 눈인사를 나누는 일분이 채 안 되는 그 순간만은 제가 웃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함께한 마지막 얼마간, 억지 미소조차 보내지 못했던 미안함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디, 당신의 얼굴도 맑고 편안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막상 정리를 시작하자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정신없이 쌓여있는 책이 가장 큰 문제였어요. 마구잡이로 꽂혀있는 책 중 조카에게 물려줄 것과 한번쯤 더 읽어야 할 것, 낙서가 되어 있거나 너무 해져서 도저히 물려줄 수 없는 상태가 된 버려야 할 것으로 나누는 일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습니다. 문제는 딸의 책장만이 아니었어요. 좀 더 엉망진창인 쪽은 내 책장이었습니다. 이미 다녀온 여행지와 관련된 책(주로 인도와 라다크 지역 여행기)을 보며 지난 여행을 떠올려 봅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저를, 당신은 좋아하지 않았어요. 자주 연락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섭이라고 생각던 그 시절, 빠듯한 어린 여행자에게 국제전화는 무언가 하나쯤은 포기하며 선택해야 할 만큼 부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전화 한 통은 한 끼 식사를 대신해야 했습니다. 동전을 잔뜩 바꿔놓고, 한국과의 시차를 계산하며,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 마음 졸이던 공중전화 부스 안의 저를 기억합니다. 전화 연결이 되기만 해도 다행이었어요. 서너 번에 한 번쯤 겨우 연결되었던 우리의 통화를 당신은 그저 기다리만 해야 했을 테니, 얼마나 답답하고 야속했을까요? 이제야 생각해 보면,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당신에게 여행은 얼마나 큰 사치로 느껴졌을지, 우리가 함께 걷는 지중해 해변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당신에게 저는 참 철없는 공주님 같았겠구나 싶습니다. 뚝뚝 떨어져 내려가는 남은 숫자를 보면서,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가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급하게 말해야 했습니다.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하는 바람에 당신은 겨우 안전하게 여행해라, 연락 자주 해라 한두 마디 정도 했던 것 같아요. 마지막 남은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보고 싶다는 말을 던지듯이 외쳐야 했던 애틋한 순간이 우리의 스무 살에 있었습니다. 언젠간 꼭 같이 오자는 말은 전화가 끊기기 전에 했는지 끊긴 후에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당신이 듣지 못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제는 어디서든 원하면 얼굴도 보며 통화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아니 저에게 더 많은 동전이 있었다면 우리는 이별하지 않았을까요? 남편은 저보다 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함께 자주 여행을 다녔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곳을 이제는 자유롭게 가고 있나요?


  읽지도 않을 책을 왜 이렇게 사무져 놓았는지, 책장에 꽂아놓으면 꼭 읽은 것처럼 착각하고 마는 저의 허영심 덕분에 서가는 이미 한참 전부터 터지기 직전입니다. 더 이상 자리가 없어 꽂아둔 책 위로 눕혀 쌓아 올린 책까지, 출근길 만원 지하철마냥 빽빽하게 들어찬 책들을 보며 한숨부터 쉬고 맙니다. 올해는 다 읽어내리라 다짐하며 숙제와도 같은 책들을 한 칸에 모아 꽂습니다. 진작 좀 치우면서 살 걸… 미루고 미루다 꼭 무슨 건수가 있어야만 시작하는 건 제 오랜 습관 중 가장 고약한 것입니다. 당신도 잘 알고 있지요? 약속에 늦은 적도 없고, 옷은 늘 다려 입던, 주변을 깔끔히 정리하고, 계획과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당신과 저는 자석의 양 극처럼 서로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런 우리가 칠 년이라는 긴 시간을 가장 가까운 사이로 지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입니다. 저는 여전히 정리도 잘 못하고, 청소와 빨래는 미루고 미뤄두었다가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때가 되어야 합니다. 기숙사 당신의 방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초대받아 갔던 날,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과 침대를 보며 깜짝 놀랐던 것이 생각납니다. 언젠가 저의 자취집에 초대했던 날, 제 방을 보며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놀랍게도, 당신이 보았던 그 방은 며칠을 땀 흘려 청소하고 정리한 결과물이랍니다.

  

  20대 초반엔 무라키미 하루키와 에쿠니 카오리의 소설을 좋아했구나, 일본 소설 특유의 나른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 시간쯤은 가볍게 타고 다니던 지하철 1호선, 인천에서 서울의 반대쪽 거의 끝까지 왕복하며 참 책을 많이 읽었지요. 운 좋게 자리를 잡고 앉아 읽기 시작하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이 되면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바로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원래도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것은 긴 지하철 여행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짧은 데이트 후 돌아오는 길이 지루하지 않으려면 새 책 한 권을 구입해야만 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만남은 꼭 서점에서 끝나곤 했었습니다. 당신이 골라주는 책은, 이제야 고백하지만 제 취향이 아니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소설책 세 권쯤을 뭉쳐 놓은 듯 두껍고, 책장에서 꺼내다 자칫 놓치기라도 하면 발등을 아작내고 말 것 같은 두꺼운 고전들은 정말이지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한껏 멋을 부리느라 꽉 끼는 구두를 신고, 책 한 권도 들어가지 않는 작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어린 아가씨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었어요. 집에서 가져간 책과 당신과 함께 산 책 두 권을 들고 돌아오는 늦은 밤의 1호선 안에서, 저는 다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네요, 당신 덕분에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좋아하던 것이 책이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여전히 책을 좋아합니다. 이제는 쓰는 것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편지를 씁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 할 것만 같았거든요.


  한 때 유행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요즘 푸바오라는 판다에 대한 사진집이 인기라고 하는데, 우리가 만나던 당시에도 그와 비슷한 책 한 권이 인기였어요. <A blue day>. 여러 동물의 사진에 짧은 글이 한두 줄 곁들여진 사진집이에요. 책을 정리하다 보면 누굴 줄까, 간직할까, 버릴까 고민하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A blue day는 "간직할까"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다시 책장에 자리 잡았습니다. 버릴까 상자로 들어간 책들을 한번 훑어보고 있었어요. 주변을 잘 챙기지 못하는 제가 책 사이에 뭔가 중요한 것을 끼워놓았을지도 모르니까요. 책갈피라던가, 네 잎 클로버나 말린 꽃잎, 또는 지폐 같은 것들. 처음엔 심장이 철렁했습니다. 그저 확인차 한 번씩 휘리릭 넘겨보다가 당신이 남긴 짧은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책 첫 장에 쓴 당신의 편지였어요. 


"평일에는 힘들고 주말에만 살아난다고 했지? 이 책을 보는 순간만이라도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받는 이와 보내는 이에 우리의 이름이 떡하니 쓰여있는 편지가 쓰인 책이, 딸도 남편도 볼 수 있는 책장에 꽂혀 있었습니다. 딸이 보았다면 분명, “엄마, 00이 누구야?”하고 물었을 테니 아직 못 본 것이 분명합니다. 남편은 책을 잘 읽지 않으니 못 봤을 가능성이 크지만, 혹시 봤더라도 굳이 제게 묻지 않았을 겁니다. 내용에는 아무런 암시도 없는 짧은 편지였지만, 저는 꼭꼭 숨겨두었던 비밀을 들킨 것처럼 심장이 덜컥하고 말았던 겁니다. 글씨가 참 단정했습니다. 꾸며주는 말 하나 없는 짧은 문장과 그 흔한 하트 하나 없는 담백한 글이 참 당신답습니다. 그 무렵 저도 몇 통의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갈수록 드물게요. 당신이 뭐라고 답장을 했는지, 아니면 하지 않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답장을 했더라도 저는 당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버리거나 정리했고, 우리의 시간은 이미 십 년을 훌쩍 넘는 공백이 있으니까요. 


  제가 이 편지를 쓰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의 편지를 발견한 것. 저는 정말 오랜만에 당신을 떠올렸고, 당신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27살로 돌아간다면, 우리에게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는 연인이 된다면, 그리고 다시 마지막 통화를 하던 그날로 갈 수 있다면, 저는 그때처럼 어리석게 굴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긴 시간을 함께한 사람에 대한 의리와 예의를 지키며, 당신에게 준 상처를 반쯤은 줄이면서 다시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당신이 편지를 쓴 그 첫 장을 찢어냈습니다. 그리고 A blue day는 다시 책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가끔 우울한 날 그 책을 펼쳐보며 웃고 싶어 졌습니다.


  이제 만 나이로도 사십이 넘었습니다. 최근에 구입하거나 빌려 읽은 책들은 주로 교육과 관련된 주제를 다룬 것입니다. 그나마도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수 있는 시간은 딸이 잠들고 집안 정리를 대충 해놓은 늦은 저녁, 자정이 가까울 때가 많습니다. 보통은 맥주 한 캔이나 마트에서 파는 보급형 와인 한 잔과 함께 합니다. 누워서 유튜브나 보고 싶지만 억지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도대체 한 달에 책 한 권도 보기 힘든 워킹맘이 되었습니다. 책을 핑계로 술을 한잔 하는 지금만이 나 혼자 오롯이 있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 책 읽는 것만이 유일한 즐거움이던 그때를 떠올려 봅니다. 이제 저는 누구에게 가기 위해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기쁨을 알게 해 준 두 사람은 옆 방에서 곤히 자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운전을 시작한 지 꽤 되어 지하철을 탈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큰맘 먹고 일부러 나가지 않으면 서울까지 갈 일도 거의 없고요. 당신은 어떤가요? 여전히 두껍고 지루한 고전을 즐겨 읽나요? 책장을 정리하며 당신을 떠올리게 될지 몰랐습니다. 옛 연인을 떠올리고 추억하는 마음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다시 만나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은 아닙니다. 서툴고 정리되지 않았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저를 추억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신이 써 준 편지를 찢어낼 수밖에 없었던 저를 이해하시겠지요. 저의 그 어떤 흔적이 가끔 발견된다면, 그렇게 비워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그 어떤 희미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살면서 그녀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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