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바닥에서 엎어져 있는 음식물 쓰레기통, 통 밖으로 널브러진 음식물 쓰레기, 그 속에서 보이는 말라비틀어지고 썩어서 곰팡이까지 슬어 있는 단무지.
눈을 감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그려보라고 하는 A 씨의 말을 듣고 따라 해 보았다.
내가 그려 본 나는 쓰레기 속의 곰팡이 난 단무지였다.
그려보는 모습에서 주르륵 눈물이 났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내면, 평생 짊어지고 가는 애달픈 본모습.
그래서인지 언제나 노을만 보면 눈물이 났고 상처투성이 인물을 보면 가슴이 찢어졌고 세상에 발을 내미는 걸 두려워하고 감히 누구에게도 쉽게 다가서는 법을 몰라 주변인으로만 배회하고 두려움 속에서 떨면서 견뎌내는 시간을 지나왔다.
빨간 신호등이 켜진 건널목 한복판에 있는 느낌.
언제나 길을 잃은 듯 지쳐있는 허술한 모습.
손잡이 하나가 부러져 버린 가위.
아랫단이 막혀서 더 이상 다리가 들어가지 않는 바지.
깜깜하고 진득한 어둠을 헤집는 기분.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세상에 던져진 내 영혼과 겉모양은 이러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지만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그것조차 알지 못한 채 그냥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무언가가 다가와도 눈치조차 챌 수 없는 아둔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걸 감추기에 급급하게 살아가고 있다.
조물주가 아닌 다음에야 모두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어리석음과 영민함은 동전의 양면처럼 어떤 공간에서는 천재가 될 수도, 어떤 공간에서는 둔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존재하는 공간에 알맞은 모양을 타고났다면 그 존재가 두드러질 테고 나아가서는 추앙받는 존재가 될 수도 있을 테고, 나와 공간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 반대가 될 소지가 크다. 나는 언제나 공간과 동떨어져서 공간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발버둥 쳤다.
더러는 상황이나 조건에 극적으로 맞추려고 노력하고 더러는 피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주어지는 공간이나 시간이 끝없이 멀리 있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노력밖에 없었다.
얼굴에 쓴 가면이 본인의 진짜 얼굴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세상에 무턱대고 나와서 흙탕물을 만들다 못해 온 세상을 쓰레기장으로 만드는 건 아닌지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게 나만 이렇게 힘겨운지 정말 모를 일이다. 그러한 나 조차도 사랑을 받았던 적도 있었으니 봄날의 그것처럼 짧고도 달콤했다.
지금의 남편은 부모가 없다.
부모가 없기로는 나도 똑같다. 존재하지만 만난 적이 없으니 나는 없는 것과 같고 남편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으니 부모가 없다. 부모가 없는 것이 때론 아쉬울 때도 있지만 나에겐 대체로 장점이 더 많다.
관계에 얽매이길 싫어하는 성격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첫 만남에 고향을 묻고 몇 살인지를 묻는 한국사회에서는 나의 이러한 성격이 유리하지는 않다. 남들과 다를 바 없다는 듯이 행동하지만 가족을 소재로 모두 다 같은 상황일 거라는 가정하에 얘기하는 집단에 속한다면 참으로 곤란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부모가 노쇠하면 자식이 당연히 모셔야 된다는 생각들, 이웃의 어른들은 언제나 나의 부모처럼이어야 한다는 생각들, 노인들의 참견은 다 이유가 있으니 새겨들어야 한다는 생각들, 연장자의 얘기에 반대 의견을 얘기하면 말대꾸라고 싹을 잘라버리는 생각들, 여러 불합리한 생각들이 사는 내내 갑갑하고 떨치고 싶은 관념들이었다.
나이가 많고 적음으로 상하관계가 맺어지는 이 사회에서 나는 어째서 이방인 같은 생각들로 겉돌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본디 배운 데가 없어서 그렇지 라는, 말들을 들으며 견뎌야 했던 시간들이 무겁고 차갑다.
외국의 어느 영화에서 본 광경이었는데 시모가 아들의 집에 살고 있다면 며느리가 시모에게 남의 집에 얹혀 사는 존재로 취급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며느리의 온갖 굴욕들을 꾹 참고 견디는 시어머니의 얼굴은 한국의 고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내가 사회화되지 못한 걸까. 아마도 내가 가지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입 밖으로 끄집어낸다면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나를 상종 못할 사람 취급할 것이다.
다수의 생각과 논리가 바름이라고 정의 내리는 사회에서 나 같은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정글에 떨구어진 문명인이 느끼는 감정과 같을까. 문명사회에 떨구어진 야만인과 같을까.
주어진 모든 형식과 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억압에는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나는 어쩌면 진정한 아나키스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모가 없이 살아온 나의 인생에 기인한 것인지 타고난 본성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주 잠깐 시부모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전남편과 산 10년의 시간.
다시 찾아오지 않을 나의 봄날.
전남편은 나의 과거를 알았지만 내 과거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고 두 딸을 낳으면서 10년을 같이 살았다. 노는 걸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하는 명랑한 성격이었고 사람을 좋아하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현재의 남편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 사랑했다.
할머니의 집을 나와 길거리를 전전하다 술을 팔기도 하고 몸을 팔기도 했던 나의 과거를 포근히 안아주던 사람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고 있던 전남편은 꽤나 활달하고 웃음이 많으며 참으로 열심히도 사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농사지으며 아들을 키운 시어머니는 그 아들이 목숨이자 생명이었고 그런 아들의 인생을 늘 안타까워했다.
"저렇게 잘 생긴 애가 어딨냐? 부모 잘 만났으면 테레비에 나올 인물이야."
술이 올라 기분이 한껏 취할 때마다 외치는 소리였다.
시어머니의 말마따나 얼굴도 잘 생겼었다.
그의 자상 함 보다 먼저 마음에 들어왔던 것이 얼굴이었으니 시어머니의 그 말엔 언제나 나의 뿌듯함도 더해졌다.
작은 시골마을 시내의 어느 옷가게에서 점원으로 있을 때 나는 전남편과 만났다.
술 팔고 몸 팔던 생활에 지쳐서 연고도 없는 동네로 무작정 이사를 왔고 그곳에서 몇몇 가게의 점원으로 전전하다가 옷가게에 정착한 지 반년이 넘어갈 때쯤이었다.
식당이나 슈퍼에서보다 옷가게가 나에게 적성이 맞았고 공간 자체가 꽤나 안정적인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화장 조금만 하면 개성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였고 무엇보다 나는 몸매가 좋았다.
전남편이 늘 내게 하던 말이
"이 몸매는 전국 어디를 찾아도 없을 걸?."이었다.
연애하자고 찾아올 때면 "난 술이나 팔던 여자예요."라고 단칼에 거절했지만 내 마음은 말과 달라서 이미 전남편을 좋아하고 있었다.
이십 대에는 조명이 없어도 빛이 나고 향기가 날 때이니 가난한 집의 남자던 과거가 있는 여자던 그런 것들은 아무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리라.
이 남자 이러다 말겠지 싶다가도 매일매일 찾아 주는 얼굴을 떠올리며 달뜨곤 했다. 나의 첫사랑이었다.
우린 어렸지만 진정한 사랑이었고 사랑을 한다면 이처럼 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을 했다.
돌아다니면 모두가 아는 얼굴일 정도로 작은 동네였고 우리의 연애는 금방 시어머니의 귀에 들어 가버렸다.
어머니에게 연애를 들켜서가 아니라 만나기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이미 나와 함께 하려는 생각만 할 때였다고 했다. 그래서 전남편은 얼굴 볼 때마다 결혼하자고 졸랐고 난 아직 때가 아니라고만 하면서 피 했다.
연애가 좋지 가정을 이루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도 말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불안과 두려움이 앞섰고 갈피를 잡지 못하기도 했다.
누군가와 한 공간에 거주한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할 때에 남편은 그렇게 다가왔다. 버림받기 싫어서 내가 먼저 밀어 버리는 나의 태생 때문이기도 했는데 난 나의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 했다.
할머니와 같이 살았고 부모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자란 나의 유년기는 지금 생각해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양반 집안에서 귀하게 자랐다는 할머니는 결혼하자마자 전쟁통에 일본으로 돈 벌러 간다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대신해서, 하나 있는 아들을 어렵게 키웠고 또 그 아들이 놓고 간 손녀를 어렵게 키웠다. 할머니의 집은 시장통에 위치해 있었고 술주정뱅이 고주망태였던 할머니는 언제나 술에 절어 있었다.
동네 사람 누군가가 와서 "너네 할머니 길에 누워 계신다. 모시고 가라."라고 하면 40킬로도 안되던 아이의 몸으로 할머니를 끌고 와서 방안에 눕히곤 했다.
학교 갔다 오면 할머니는 일 나가고 집에 없고 언제나 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을 잤다.
따지고 보면 오십도 안 된 여자가 무슨 일을 해서 아이를 키울 수 있겠는가. 또 무슨 여유가 있었겠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개불알꽃이 피던 골목을 뒤로하고 나는 할머니 집을 나왔다.
그리고 한 번도 할머니를 찾지 않았다. 엄마이기도, 할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나를 찾았을까.
오히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술에 취해 지나는 사람과 시비가 붙고 욕을 하고 길에 쓰러져 자는 그런 일과를 변함없이 했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 할머니를 그리워하지 않는 내가 덜 미안해지기도 하거니와 그래야 그녀의 인생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150도 안 되는 키로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는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가야만 그녀답다.
제대로 된 가족이란 걸 경험해 보지 못 한 나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결혼이라는 걸 하자고 하는 전남편의 그 말이 그저 두렵기만 했다.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던 나의 마음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짓눌려 어깨를 좁히고 다녔고 할머니에게 버림받기 전에 내가 먼저 버려야지 하는 모진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을 때라 그저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 옹졸하고 단단한 알의 껍질을 깨어 준 건 전남편이었고 이 사람이라면 가족도 행복할 수 있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한 없는 사랑으로 나를 보호해 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준 사람이었던 첫사랑.
시어머니의 아들 소유욕에도 그저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던 사람이었다.
마당에서 조촐하게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 국수를 나눠 먹고 나는 남편과 시어머니가 사는 시골집에서 둥지를 텄다. 그렇게 딸 둘을 낳고 10년을 행복했다. 아들이 없을 때는 시어머니의 박대가 노골적이었고 한 때 막살았다고 하더라는 소문을 듣고 온 뒤로는 아들이 있건 없건 소리를 질렀다. 그런 시어머니가 존재했어도 난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그건 전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이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왜 불쌍한 애를 힘들게 하세요?"
전남편은 언제나 시어머니 앞에서 내 편이 되어 주었고 그건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사랑이었다.
시집살이가 아무리 어려워도 전남편의 사랑은 어두웠던 나의 과거를 어루만져 주었고 껌껌한 나를 달라지게 만들었다. 비록 나를 미워하는 시어머니라도 나는 미워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읍내를 나갈 때면 꽈배기라도 손에 들고 와 내 입에 먼저 넣어주곤 내 웃음을 봐야 본인 입에다 꽈배기를 넣던 사람이었다.
결혼 초에 두어 마리 있던 소가 내가 집에 들어오면서 병들어 죽는 놈도 없이 스무 마리가 되었다면서 속삭이던 사람.
동네 개도 아들을 낳더라고 모진 말을 하는 시어머니조차 나에게 어떤 걸림돌도 되지 못했다. 전남편은 두 딸을 너무 사랑했고 평생 데리고 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좋은 사람이었건만 허락된 내 복이 거기까지였는지 남편은 나와 딱 10년을 살고 죽었다.
풍년이 들어 매일매일 웃고 다니던 그 해 늦가을엔 콤바인까지 장만해서 잘 생긴 얼굴이 더 잘 생겨졌고, 농진청과 군청의 지원을 받아서 할부로 나누어 내면 몇 해만 고생하면 된다고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모든 게 너무 충만했다.
아름다웠던 전남편은 새로 산 콤바인에 깔려 죽었다. 남은 할부를 내지도 못하고 그렇게 가 버렸다.
비가 너무 와 논바닥이 질어서 그랬다는 사람도 있었고, 짧게 살다 가려고 그렇게 웃고 다녔나 보다, 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편 잡아먹을 얼굴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말이 어떻게 날아와 내 속을 찢어 놓았는지 다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그 모든 현실을 온전히 받아 들이 질 못했다. 허부적대기만 하다 장례식이 끝나 버렸고 전남편은 봄처럼 찾아와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봄처럼 떠나갔다.
그 모든 시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
잠깐 왔다 갔지만 평생 내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
봄 꽃이 날리는 이 계절엔 더욱 그리운 사람.
지금 살고 있는 남편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누구나 가슴 한쪽에 추억 하나 정도는 기대어 놓고 사는 법이니까.
아들이 죽은 시어머니는 더욱 며느리에게 가혹했고 가혹함을 견디지 못했던 나는 두 딸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소의 눈 속에, 마당에 널어놓은 수건에, 담벼락에 걸린 삽자루에, 마루에 굴러다니는 라디오 속에, 지붕 위의 하늘에, 오만 곳에 걸려있는 남편의 얼굴을 견디지 못해서 마을을 떠났다.
열아홉에 할머니를 버리고 나온 던 그때 그 모습으로 마을을 떠났다.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모양만 다를 뿐이었다.
할머니가 나를 찾지 않은 것처럼 시어머니도 나를 찾지 않길 바라면서 전남편의 얼굴이 걸리지 않는 하늘을 찾아 떠나 왔다.
할머니도 시어머니도 다음 세상에서는 그저 인연이 닿질 않기만을 소원하고 또 소원한다.
내 생애 봄날은 짧았고 따뜻했다.
가질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가졌던 탓이었으리라.
내 속의 썩어빠진 단무지가 마르고 말라서 더 이상 수분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시간을 지워나가고 있지만 나는 사랑을 했었기에 충만했다. 회상할 수 있는 보따리가 담겨 있기에 감사하다.
봄날의 꿈처럼 사랑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