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낯선 공간의 밤

by 차다

“자주 오던 곳이야?”

H가 물었다.

“아니, 처음인데 여기에서 파는 시가롤이 너무 먹고 싶었어.”

상수 주택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쉽게 지나칠 법한 흰색 상가 건물 1.5층. 이곳에 자리한 작은 가게는 간판도 눈에 띄지 않았다. H가 차를 주차하고 있는 동안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몹시 아담하다. 세 개의 테이블과 중앙을 둘러싼 바 테이블, 그리고 그 인쪽에는 오픈키친이 있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가게는 한산했다. 키가 크고 단단한 체형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가 홀로 음식 준비를 하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편한 자리에 앉으라는 듯 눈짓을 한다. 한국적인 식기와 소품들이 무심하게 놓여 있는 테이블은 유난히 고요하고 어딘가 따뜻하다.

시가롤 2pcs와 송이주를 주문했다. H가 자리에 앉자 테이블 위에는 술과 음식이 올려진다.

접시에는 큼지막한 시가모양의 롤이 두 개 얹어져 있고 워에는 샤워크림과 시나몬가루가 뿌려져 있다.

시가롤을 손으로 집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바삭한 겉피가 부서지는 동시에 육즙이 가득한 뜨거운 다진 고기, 상큼한 샤워크림, 향신료향이 풍성하게 어우러져 폭력적인 만큼 강렬한 맛이 입안에 가득 찼다.

곧바로 잔에 따라진 송이주를 들이켰다. 송이버섯 특유의 싱그러운 향과 흙내음, 은은한 풀냄새가 느껴진다. 가볍고 산미가 있는 송이주는 여운이 길지 않고 산뜻한 감칠맛 덕에 남은 시가롤에 손을 뻗게 한다.

순식간에 접시는 비워졌다. 오른쪽에 앉아있는 H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오길 잘했지? “

”응. 있다가 이거 하나 더 시켜 먹자. “

무역 쪽 사업을 하고 있는 H는 최근 직면한 문제에 대해 어려움을 토해냈다.

“고민하는 거 좋지 않아? 그 자체가 해답을 향해 가는 거니까.”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H에게 말했다. 생각의 깊이가 아득한 사람에게 위로를 건네기는 쉽지 않다. 그 깊이만큼 다가가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그저 가벼운 한 마디가 조금의 쉴 틈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추가로 속초 오징어볶음을 주문하자 말수가 적던 사장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 오징어볶음에 미나리가 함께 나오는데 최근에 부추로 레시피를 변경했어요.”

“네, 좋아요.”

흔쾌히 대답했지만 매콤한 오징어볶음에는 미나리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접시에 플레이팅 된 음식은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었다. 불향이 입혀진 오징어볶음은 부추로 만든 지미치리소스 위에 얹혀 있고, 그 위로 갈린 치즈와 딜이 올려져 있다.

오징어에 소스를 듬뿍 묻혀 딜과 함께 입안에 넣었다. 이렇게 섬세하고 다채로운 맛이 날 수 있다니.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H에게 말했다.

“지금 충격받았어. 내가 좋아하는 맛을 전부 모아놓은 느낌이야”

“나는 이 술이 너무 맘에 드는데?”

H가 홀짝이고 있는 술은 맵쌀로 빚은 감사라는 술이다. 약주에서 흔히 느껴지는 단맛과는 달리 유달리 부드럽고 가벼운 질감과 맑고 깔끔한 맛이 난다. 은은한 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은 방금 먹은 오징어볶음의 향을 전혀 해치지 않는다.

한 시간 삼십 분의 시간 동안 두 병의 술이 비워졌다. 배는 부르지만 아쉬운 마음에 메뉴판을 뒤적거리고 있자 H가 종이의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원하는 술을 고르면 하이볼로도 만들어주신대.”

“좋다. 그럼 입가심으로 한 잔만 시키자.”

전통주로 하이볼이라니, 감이 오지 않아 사장님께 추천을 부탁드리자 증류주인 추사, 키위, 선비를 소개해주셨다.

“술 이름이 키위예요? 귀엽네요.”

“제주도 구좌에 있는 양조장에서 제주도산 제스프리 농장키위로 발효한 증류주예요.”

“키위증류주는 처음이에요. 이걸로 할게요.”

키위 특유의 풍미에 탄산이 더해져 과일향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산미와 쌉쌀함이 입안을 산뜻하게 정리해 준다.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덕분에 너무 좋았어.”

H가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나도. 평소에 먹을 일 없는 음식들인데 너랑 같이 이런 곳 오니까 재미있네.”

“오늘 기분전환 됐어?”

H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굉장히.”

오늘 마신 술들만큼이나 충만하고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과 술의 조화는 H에게 몇 마디의 말보다 더 큰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