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막바지 홍천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창에 흩날린 눈발이 곧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시동을 끈 A가 내 옷차림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거 봐, 홍천은 춥다고 했잖아.”
반팔티에 반바지, 그리고 가디건 하나만 걸친 채였다.
“괜찮아. 숙소에서 안 나갈 거니까. 술은 챙겼지?”
A가 대답했다.
“사케, 위스키, 와인. 종류별로.”
“아주 좋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려 묵직한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자, 넓은 현관이 눈에 들어오는 동시에 나른한 피아노곡이 들려온다. 거실에서는 먼저 도착한 S와 K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금 나오는 음악,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뭐였지?”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S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빌 에반스. My Foolish Heart라는 곡이야.”
“오늘 날씨에 잘 어울린다.”
“그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야.”
S는 악보를 볼 줄 몰라 학원강사의 손동작을 영상으로 촬영해 외워 연습했다며, 그래서 자신이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곡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각자가 가져온 술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위스키 두 병, 사케 두 병, 와인 두 병.
A가 싱크대에 놓인 잔들을 바라보며 고심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뭘로 시작할까?”
“눈 오는 날에는 사케지.”
내 대답에 S가 주황색 라벨이 붙은 병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거 먼저 마시자. 저번주에 일본에서 사 온 거야.”
테라스에는 녹지 않은 눈이 남아 있다. 유리글라스에 따라진 사케를 한 모금 머금었다.
처음 느껴진 건 단 향과 극도의 부드러움, 미끄러운 질감이다.
“술 마시면서 처음 느껴보는 질감이야. 좀 미끌한 것 같기도 한데, 이거 뭐야?”
S가 사케의 라벨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 술은 야마다 니시키라는 품종의 쌀로 만든 준마이 다이긴조야. 준마이는 순수한 쌀이라는 뜻이고 다이긴조는 정미율이 50% 이상일 때만 쓸 수 있는 단어야. 여기 보면 정미율이 22%라고 쓰여있는데, 22%의 쌀만 남기고 전부 깎아냈다는 뜻이야. 깎으면 깎을수록 부드러워지고 당분만 남아.”
“그래서 이 정도로 부드러운 맛이 가능했구나. 입 안에 감칠맛이 계속 맴도는데 향이 맴도는 게 아니라 맛이 맴돌아. 신기하다. 술 이름은 뭐라고 읽어?”
“슈호. 빼어날 슈에 바람풍인데 높이 솟아나는 바람정도로 해석해야 하나.”
S의 대답에 A가 말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바람보다는 온실 안에 있는 느낌인데.”
“그럼 온실 안에서 맴도는 바람이려나? 미묘한 이름이네.“
처음 숙소에 들어올 때 들려왔던 빌 에반스의 피아노곡이 다시 들려왔다. 피아노 반주를 따라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던 S가 말했다.
“빌 에반스가 이런 말을 했어. 재즈는 실수를 좋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이라고.”
“지금 순간이 어떻든 긍정적이고 창의적으로 변환할 수 있다는 거네. 며칠 전만 해도 반팔을 입고 다녔는데, 홍천에 오니 갑자기 추워서 놀랐어. 그런데 눈 오는 봄에 사케를 마시고 있으니 어쩐지 사치스러운 기분이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잔을 채우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피아노 선율 속에서 흩어지는 대화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