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퇴근길은 어둡다. 비가 내리는 날은 더더욱.
지하철 계단을 걸어 내려가자 빗줄기는 시야에서 지워진다. 집을 향해 이동하는 30분은 고민의 시간이다.
컴퓨터 전원을 끄고 사무실을 나올 때의 계획은 이랬다.
곧장 집으로 가 현관에 들어서는 즉시 허물처럼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한다. 간단히 정리를 한 뒤 잠옷을 입고 버석거리는 이불 안에 파묻혀 휴대폰 앱을 켜 배달음식을 주문한다.
식탁에 앉아 영화를 틀어놓고 밥을 먹는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노트북을 들고 침대로 기어든다. 절반도 채 재생되지 않은 영화를 마저 보며 냉동실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퍼먹을 수도 있다. 이 정도면 꽤 만족스러운 계획이다.
퇴근길 지하철의 온도는 평소와 다르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미세한 습기가 목에 걸리고, 공기는 질척한 천처럼 피부에 들러붙는다.
창밖에는 어두운 벽만 지나고 있지만 지상은 젖어 있을 것이다. 차들이 물살을 가르고, 신호등 불빛이 웅덩이 위에서 번진다.
상상 속 계획은 무뎌지고 선명하고 강렬한 무언가로 신경을 일깨우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는다.
기어이 충동적으로 지하철에서 내려버린 나는 파블로프의 개가 된 양 단골바를 향한다.
“왔어?”
흰색 셔츠에 검은 앞치마를 허리에 동여맨 사장님이 담백한 인사를 건넨다. 손님보다는 동네 친구를 대하는 것에 가까운 말투다.
메뉴판을 볼 필요 없이 주문을 한다.
“생맥주 한 잔이랑 동파육, 송하강주 주세요. “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신선한 생맥주를 들이켠다.
냉동실에 넣어둔 유리잔이 입술에 닿고 갓 따른 맥주의 탄산이 식도를 긁으며 넘어가는 순간 짜릿한 시원함이 눅눅하던 기분을 단번에 씻어낸다.
맥주잔이 비워지자 송하강주와 동파육이 올려진다.
오랜 시간 익혀진 동파육은 젓가락을 대는 순간 고기와 윤기가 도는 지방층이 부드럽게 떨어진다.
입 안에 넣어진 육질은 캐러멜화된 단맛과 팔각, 간장의 향이 둥글게 어우러지며 혀 위로 녹아든다.
송하강주의 첫 터치는 강하다. 알코올의 열기가 올라온 뒤 곡물과 과실의 단향이 뒤따라온다. 쉴 틈 없이 이어진 고량주의 뜨거운 열감이 어딘지 모를 허기를 불러일으킨다.
“사장님, 저 메뉴에 없는 음식 먹고 싶어요.”
“뭐로 먹고 싶은데?”
“해산물 베이스에 에그면이요.”
“해산물은 내 맘대로?”
“사장님 맘대로.”
방어를 손질하고 면을 삶고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 오는 날에는 왜 술이 마시고 싶어 질까요?”
“난 비 온다고 특별히 더 마시고 싶지는 않는데.”
“아, 그래요?”
“날씨가 어떻든 술은 항상 마시고 싶거든.”
“아하.”
멍하니 대답을 하며 생각했다.
아무렴 어때. 지금 이 순간, 불만이라고 부를 만한 건 무엇도 없다.
적당히 오른 취기와 이 정도 온도의 밤이면, 살아 있다는 감각으로는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