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11시. 평소라면 잠에 취해 침대에서 뒤척거릴 시간이다. S와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공원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마지막 급경사의 곡선에서 시야가 넓어진다.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하늘 아래 흰 파라솔이 가득하고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그윽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친다.
부스 안쪽으로 들어서자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 재킷을 걸치고 진지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바라보고 있는 S의 모습이 보인다.
가볍게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S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찍 왔네?”
“나도 방금 도착했어.”
S가 어깨에 맨 가방에서 검은 목걸이가 달린 유리 에스프레소잔 두 개를 꺼냈다.
“이걸로 커피 시음하면 돼.”
“이게 뭐야? 잔 귀여워.”
“일회용 컵 대신 커피에 각자 취향을 입힐 수 있도록 개인컵을 지참하라 하더라고. 그래서 네 것까지 챙겨 왔어.”
S의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모양의 잔을 들고 있다.
“취지가 좋다. 잔은 깨끗이 씻어 온 거지?”
S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당연한 소릴 하네.”
국립극장에서 열린 아트인 커피 페스티벌은 전국의 20여 개 로스터리가 부스를 설치해 커피를 소량씩 맛볼 수 있는 시음회다.
파라솔 아래 나무테이블에는 드리퍼, 주전자, 시음할 커피에 대한 정보를 적어놓은 메뉴판이 나열되어 있다.
부스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커피를 이야기하고 있다. 싱글 오리진의 산미를 설명하는 곳, 콜드브루를 따라주는 곳, 블랜딩 한 원두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곳. 맞은편의 부스에서는 손님이 구입한 원두를 정성스레 포장하고 있다.
에스프레소잔에 고서라는 커피를 받았다. 태운 나무와 감초의 미세한 단맛이 겹쳐지고 유난히 진한 맛이 묵직하게 입안에 남는다.
광장 전체에 흐르는 커피 향처럼 커피잔을 손에 든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대화가 오간다.
열세 번째 커피를 넘기자 혀끝이 둔해졌다. 산미와 쓴맛의 경계가 흐려지고 커피의 향은 평평하게 남는다. 속이 텅 빈 것 같은 묘한 허기가 느껴져 완전히 다른 온도의 무언가가 간절해졌다.
지친 기색을 눈치챈 S가 말했다.
“이제 좀 쉴까?”
“응. 맥주 마시고 싶어.”
“맥주 팔고 있는 걸 그새 봤나 보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흰 천막아래 폴딩박스로 만들어진 간이의자에 앉았다. 중앙 무대에선 검은 원피스를 입은 보컬이 나른한 음성으로 ‘Cheek to Cheek’을 재즈풍으로 부르고 있다.
세 곡 가량의 음악이 흐를 즈음 S가 간단한 음식과 맥주를 들고 돌아왔다.
“와, 이게 뭐야?”
“나물 플레터랑 필그림, 마링고 맥주.”
흰색 원형 용기에는 머위와 방풍, 달래로 만든 나물살사에 버무려진 현미밥 플레터가 소박하게 담겨있다.
음식을 덜어 입 안에 넣으니 산뜻하게 이어지는 나물의 향과 현미밥의 살아있는 식감이 느껴지고 매실청에 절인 새콤한 콩이 한 번 더 입안을 채운다.
“별 거 아닌 것 같으면서 굉장히 맛있어. 이거 뭐지?”
“원래 종종 가던 곳인데 마침 부스가 있길래 사 왔어. 보통 이런 밸런스는 싱거운데 여긴 맛이 비어있지 않아. 미묘한 지점을 잘 잡는다고 해야 하나.”
“정말 그런 느낌이야. 이런 장르의 음식은 처음이야. 뭐랄까, 맛에서 들판을 걷는 느낌이 나.”
“맞아. 대단히 맛있다기보다는 잔잔한 느낌이지.”
나물 플레터 옆에 놓인 미색 종이질감의 맥주캔을 집어 들었다. 주황색 헬멧을 쓴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이 시선을 잡는다.
캔을 따고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열대과일과 으깬 망고의 과육향이 싱그럽게 퍼진다. 에일맥주 특유의 산미가 선명하고, 넘긴 뒤에는 천도복숭아의 향이 길게 남는다.
감탄을 하며 S에게 말했다.
“아, 이제 살 것 같아. 다른 맥주도 당장 사 올래.”
“여기 커피 페스티벌인 건 알고 있는 거지?”
“이렇게 맛있는데 어쩔 수 없잖아.”
S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데, 결국 맥주가 이겼네.”
추가로 사 온 맥주와 먹다 남은 피칸파이 위로 햇살과 그늘의 경계가 그어졌다.
문득 S에게 말했다.
“폭신한 솜사탕을 크게 한 입 머금은 기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