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여름감기였다. 사흘차에 겨우 몸을 움직여 병원에 갈 수 있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종이에 글씨를 써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는 온몸이 삐걱거렸고 표피처럼 붙어있던 우울감은 내장 깊숙이 파고든 듯했다.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시고 샤워를 한 후 T에게 같이 저녁을 먹지 않겠냐는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자는 답장이 왔다.
T의 회사 부근인 여의도 역에서 내리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근처 커피숍 창가에 앉아 가방에 넣어뒀던 책을 꺼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척이나 좋아해 몇 번이든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막상 빼곡히 들어선 글씨를 바라보니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아 책장을 펼쳐둔 채로 커피를 홀짝였다.
그래 당신은 여자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정말 모르시오?
몰라요.
펼쳐진 138페이지 문장 아래 일주일 전 책을 읽으며 마셨던 노란색 홍차 티백 포장지가 끼워져 있다.
한 시간가량이 지나자 창 밖으로 내쪽을 향해 걸어오는 T의 작고 동그란 얼굴이 보인다.
눈썹을 살짝 찌푸린 T가 말했다.
“미안, 갑자기 긴급회의에 불려 가서 늦었어.”
“그럼 저녁 먹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는 거야?”
“아니. 집으로 도망칠 거야.”
“좋은 생각이야. 배고파. 빨리 밥 먹으러 가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해서일까, 애정하는 친구를 만나서일까, 식사와 함께한 반주 덕분일까. (반주일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이긴 한다.) 집에서 나올 때와 달리 기분이 확연히 좋아졌다.
T와 헤어지기 전, 지하철 역 앞에 문을 연 케이크가게가 보였다.
“잠깐만, 저기 갈래.”
알딸딸한 취기가 오른 늦은 밤에 보이는 케이크 가게는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느껴진다.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 옆의 진열장에 남은 케이크는 샤인머스캣 생크림과 블랙포레스트가 전부다. 블랙포레스트를 가리키며 T에게 말했다.
“저걸로 사 줘. 오른쪽에 있는, 체리 올려진 거.”
케이크를 계산한 T가 포장된 종이봉투를 가방 안에 넣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머리를 말렸다.
개운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있던 우울이 존재감을 키워간다.
잠깐의 고민 후 찬장에서 글렌피딕 한 병을 꺼냈다.
테이블 매트 위로 컵케이크 모양의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블랙포레스트를 놓고 작은 항아리 모양의 유리잔에 짙은 호박빛 위스키를 따른다.
블랙포레스트는 다크초콜릿 시트와 키슈로 절여진 체리, 휘핑크림이 층층이 포개지고 얇게 깎인 초콜릿 조각 위로 중앙에 검붉은 통체리가 얹혀 있어, 깊고 어두운 숲 위에 붉은 열매가 숨어있는 인상을 자아낸다.
디저트 스푼으로 케이크를 깊게 떠 입에 넣는다.
풍부한 휘핑크림이 다크초콜릿의 쌉싸름한 맛과 함께 녹아들고, 탱글하게 씹히는 체리과육의 키르슈 향이 맛의 밀도를 가중시킨다.
케이크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 글렌피딕을 한 모금 머금는다.
첫 모금엔 말린 살구와 바닐라의 향기가 두 번째 모금에서는 오크 숙성의 스파이스가 긴 여운을 남긴다.
어느새 케이크컵은 비워졌고 네 잔의 위스키를 마셨다.
일주일간 쌓였던 피도의 무게가 부드럽게 풀리고 온몸이 조금씩 느슨해진다.
‘밥을 사줘.’
‘케이크를 사줘.’
이 두 문장에 내포된 감정은 결을 달리한다.
밥을 사달라는 말에는 친밀감, 자신의 호의에 대한 은근한 대가성 요청, 유대감을 기본으로 한다면 케이크를 사 달라는 건 좀 더 사적인, 애정과 응석, 혹은 작은 위안의 신호다.
희미하게 남은 멜랑꼴리의 그림자를 더 이상 지워내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숨을 들이켠다.
블랙포레스트의 다크초콜릿과 위스키에서 느껴지던 씁쓸함이 달콤함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듯, 그저 담담히 지금의 감정이 천천히 스며들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