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공간

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타인의 온기와 애착이 빚어낸 공간

by 김보리

집은 떠나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공간이다. 집은 면적이나 거래 금액 등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집도 시대를 따라 건축적 흐름을 가지게 된다. 초가집에서 한옥으로, 단독주택에서 빌라나 아파트로 주거형태가 변화되면서 가족과 공동체 문화도 다소 변화된 것이 사실이다.


1941년생 예산읍 오리동에 거주하는 왕영자 씨가 거주하는 주택(예산리 672-5)은 1964년 일본식 가옥을 뜯어 한옥 형태와 결합해 지어진 주택이다. 왕영자 씨는 박윤호 씨의 손녀로 박윤호 씨는 슬하에 3녀를 두었고 왕영자 씨는 그중 막내 손녀다. 박윤호 씨(1889년~1958년)는 평산박씨 32세손으로 평소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동아일보 1937년 11월 16일 자 기사에 박윤호 씨에 대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11월 12일 예산군청에서는 절부 표창식을 거행했다. 예산군 예산면 오리정에 거주하는 박윤호 여사로 젊어 남편을 여의고 가난한 살림에 자식도 없이 그날그날을 살아오다가 왕 준을 양자로 데려왔다. 왕 준이 장성하기를 바라고 근근하였던바 오날에는 남에 지지 않을 만큼 돈을 모았다. 이에 그는 자진해 사회사업에 눈을 떠서 빈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기를 수회 하였으며 금년에는 대전여고보 설립비로 500원을 내고 충남호비행기 헌납자금으로 100원을 냈다. 앞으로는 자녀교육 사회사업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치겠다고 한다.


1930년에는 열녀각, 1940년에는 박윤호 진휼기념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치하했다. 왕영자 씨는 할머니 박윤호 씨가 장날이면 아이건 젊은이건 배가 고픈 자들을 불러다 꼭 밥을 해 먹였다고 기억한다. 동네 사람들은 박윤호 씨를 ‘밥할머니’라 불렀다. 오가면 전부터 원평리와 주교4리 벼룩뿌리까지의 토지가 박윤호 씨 소유였다.


현재 왕영자 씨가 거주하고 있던 집도 본래 박윤호 씨가 거주하던 집의 일부를 뜯어 현재 위치에 다시 지은 집이다. 박윤호 씨가 거주하던 자택은 우물이 좋아 물이 마르지 않았고 예산성당 밑까지 전부 밭이었다고 한다.

현재 왕영자 씨가 거주하는 주택 기와는 점토기와를 사용했고, 일본식 주택의 특징 중 하나인 돌출된 창문 구조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일반 한옥과 달리 출입 현관문이 있어 신발을 벗고 복도를 올라갈 수 있는 구조다. 현관 좌측으로 방이 있고 우측 복도를 따라 방이 2개가 있다. 주택 좌측 뒤편에 따로 부엌을 내어 구들과 아궁이를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사랑채는 하숙집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현재는 방 한 곳에 싱크대를 들여 왕영자 씨가 기거하고 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구들과 아궁이에는 오래 묵은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사랑채 역시 오래 사용하지 않아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구들을 사용하다가 전기필름 난방을 이용하고 있다. 오랫동안 구들을 사용했던지라 마루 문을 여는 순간 오래된 나무 냄새가 훅 들어왔다. 서양의 경우 난방과 밥을 하는 불이 따로 있는 구조다. 그러나 구들은 난방과 취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구조다. 밥을 하면서도 난방을 하고, 난방을 하면서도 밥을 할 수 있는 드문 경우다. 밥을 하면서 따뜻해진 아랫목에는 한가운데 불룩한 이불이 있다. 미처 끼니를 맞춰 집에 들어오지 못한 식구를 위한 밥 한 공기가 얌전하게 놓여 있다. 겨울이면 메주를 띄워 이불을 덮기도 한다. 식혜를 만들 때도 아랫목은 내 차지가 되기 힘들다. 밥알이 동동 떠 제대로 된 식혜가 될 때까지 아랫목에 양보해야 한다.


불에 제대로 달궈진 구들장 덕분에 거무스름하게 타버린 아랫목은 그저 따뜻하기만 한 곳이 아니다. 어머니의 가족에 대한 배려와 한겨울 한 이불 밑에 온 가족이 모여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군고구마를 까먹던 따뜻한 기억이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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