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endipity Nov 02. 2022

아들 둘 아빠의 육아휴직 이야기.03

03. 휴직자로 살아가기

03. 휴직자로 살아가기

아직은 아무런 계획이 없어요.


 휴직 전날까지 출장을 다녀왔기 때문인지, 휴직했기 때문인지 휴직 전과 휴직 후의 생활은 차이가 많았다. 알람을 해제해두었는데도 출근 준비 시간에 눈이 떠졌다. 출근 중일 때는 혹시나 일어나지 못할까 봐 알람을 맞춰두었지만 생각해보면 알람이 없었더라도 기계적으로, 습관적으로 일어나서 회사를 향해갔을지도 모른다. 기상 후 30~40분 내외로 출근 준비를 하고 셔틀을 타면 7시 40분 전후로 사무실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PC를 켜고 카누를 한 잔 타서 마시거나, 출근길에 사내 카페에서 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게 일상의 시작 루틴이었다.


 휴직 후 느끼는 가장 큰 다른 점은 매일 아침 자는 아이들을 한참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출근 준비가 사라진 대신 아이들 유치원과 학교 준비시간에 맞춰 깨웠고,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셔틀이 사라진 대신 아이들 등굣길에 함께했는데 첫째 학교 앞까지 같이 가기도 하고 첫째를 보내고 나면, 둘째의 유치원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갔다. 휴가를 쓰는 날이나 재택근무 일에도 종종 가능했지만 매일 아침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휴직 후에나 가능했다. 일상 시작 루틴 중에 변하지 않은 것은 커피뿐이었는데 차이가 있다면 머신으로 내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대한민국 탕비실 구매 목록 1호인 카누 대신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 마신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자는 이른 아침에 거실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면서 창밖을 바라보면 동료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사무실에 혼자 있는 느낌과 비슷했다.

 

이른 아침에 내린 커피의 향은 더 진하게 느껴진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면서 산책으로 몸을 풀고, 가볍게 뛰었다. 매일 출근하던 길이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뛰놀던 길이라 익숙한 장소인데도, 출근할 때는 셔틀 정류장까지 시간 맞춰 가기 바빠서 그랬는지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하늘이 보였고, 나무가 보였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며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니 대부분 바쁘게 걷거나 뛰어갔고, 몇몇은 젖은 머리를 미처 말리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표정이 밝은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표정을 보면서 얼마 전까지 나 또한 그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할 때는 주변의 꽃과 하늘을 볼 여유가 없었다.

 어쩌다 하루 쉬는 휴가도 아니고, 재택근무도 아니니 딱히 할 일이 없었고, 아직 무엇을 해야 하겠다는 계획도 없다. 더욱이 육아휴직을 시작하고 나서 이 주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와이프에게 통보 아닌 통보해 둔 상태라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이 등교하고 나면, 할 일이 없으니 집은 어느 때보다도 고요하게 느껴졌다. 무료함을 달래보고자 오전 시간에는 근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기도 하고, 아침 운동을 하지 않은 날에는 단지 내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과 주말에 도서관을 가긴 했지만 주로 어린이 도서관만 갔던 터라 종합자료실의 서가는 오랜만이다. 오전 시간 도서관에는 공부하거나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청년층부터 중, 장년층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도서관에서는 주로 이삼십대 젊은 층이 공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편견일 뿐이었다. 연세 있으신 분들이 무슨 공부를 저렇게 열심히 하실까 궁금하기도 하고, 휴직하고 잉여롭게 지내고 있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나의 편협한 사고는 헬스장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늦은 오전이나 이른 오후쯤 헬스장에 가면 젊은 사람들보다는 노년층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 또한 편견이었다. 젊은 남성, 구체적으로는 삼사십대 남성이 기대 이상 많았다. 하루 이틀은 저분들 휴가이신가 보다 생각했으나 꽤 자주 마주쳤고, 특정 시간대가 아니더라도 내 또래 무렵의 사람을 헬스장이나 단지 내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쳤다. 사실 둘째 유치원 등원이나 하원 때 버스 정류장에서 아빠들이 많이 보였는데 아주 당연하게도 출근 시간이 늦거나, 휴가이거나, 재택 근무일 거라고 생각했다. 육아휴직이 시작하고 한 주, 두 주 시간이 지날수록 낮 시간대에 자주 마주치는 내 또래의 아빠들이 나와 비슷하게 일정 시간을 회사에서 근무하는 근로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스스로 삶의 다양성을 인지하고 있고,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생각했으나 정말 생각뿐이었다. 휴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나와 다른 패턴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삶의 여러 관문을 지나면서 이런저런 경험치가 쌓인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느꼈다. 잠시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니 사실 나는 우물 담장만 높이 쌓아둔 우물 안 개구리 같았다. 줄 곳 나와 비슷한 길을 지나온 사람들하고만 함께 지내서 다른 것은 잘 보지 못했다. 학교가 그랬고, 취업이 그랬고, 결혼, 출산과 육아가 그랬다.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에는 우물 담장을 넘어 다른 세상을 경험해봐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이것 또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이 없다.


작가의 이전글 아들 둘 아빠의 육아휴직 이야기.0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