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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바탕으로
우리 문학사 이해하기

1. 문학을 어디다 써?

1. 문학을 어디다 써?

‘인구론(인문계의 구십 프로는 논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요즘 자주 듣게 되는 신조어입니다. 또, 명절이면 지겹게 듣는 잔소리인 “취업은 했니?”, “결혼은 했니?”와 같은 말을 절대적으로 방어하는 말이 “문과인데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잔소리를 했던 친척들이 오히려 사과를 한다고 하더군요.

약 25년 전, 제가 국문학과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저희 부모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나와서 뭐 하려고 그래?, 그거 하면 밥이 나오니? 쌀이 나오니?" 주변 반응도 비슷했습니다. "굶어 죽기 딱 좋겠네!", "사람이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아?"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시를 쓴다고 깝죽거리며 대학 4년을 마쳤습니다. 그나마 교육대학원에 들어가서 국어교육을 전공한 덕분에 다행히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은 벌어 먹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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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제로 계열별 취업률을 살펴 보니, 인문계열을 전공한 학생들의 취업률은 100명 중 57명 정도로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굳이 왜 지금 이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까요?

사실 이미 제가 전에 썼던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올바른 교육>이란 글을 통해 글로벌 기업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원하고 있다는 설명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그런 부분은 제외하고 문학의 본질과 그 역할에 대해서만 이야기 드릴까 합니다.

우선 분류를 해 보자면 글이라는 큰 분류 안에 문학(시, 소설, 수필, 희곡 등)과 비문학(연설문, 기사문, 편지, 독후감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문학만을 다시 정리하자면 ‘함축과 운율’로 표현되는 시, ‘묘사와 서사’로 표현되는 소설, ‘통찰과 사색’으로 표현되는 수필, ‘대사와 지문’으로 표현되는 희곡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렇다면 대체 문학이란 무엇일까요?



문학이란 사람이 내는 소리로 뜻을 갖고, 글로 적고, 쾌감을 주며, 도리에 합당한 것이다.

- 율곡 이이

문학이란 특정한 형식 하에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 춘원 이광수


이것들은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 중 가장 제 기준에서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문학이란 의미를 지니고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 외에도 즐거움과 교훈, 주제 의식 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문학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글과 문학적인 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간혹 어떤 사람들은 ‘잘 쓰인 글’을 문학적인 글이라고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국화’라는 주제에 대한 글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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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전에서 찾은 국화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야말로 국화에 대하여 알기 쉽게 잘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 글을 문학적인 글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문학적으로 국화에 대해 잘 쓰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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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사전에서 ‘국화’를 설명한 글에 비하면 무척 짧은 글이지만, 오히려 ‘국화’라는 꽃에 대한 느낌은 더 잘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문학적으로 잘 쓰인 글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문학이 아닌 글에서의 기호(글)은 대상과 동일한 관계를 형성하지만, 문학에서 기호(글)은 대상을 포함하는 비대칭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럼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문학은 돈이 되지도 않고, 권력을 쥐어 주지도 않으며, 명예와도 큰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럼 이걸 어디에다 써 먹어야 할까요?

하지만 문학이란 장르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중세 시대 서양의 문학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는 확실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신을 찬양하던 인간들이 인간을 찬양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문학을 포함한 예술가들은 권력자를 찬양하는 내용을 만들어 바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권력자들은 파트롱(patron)이 되어 그들을 보호하고, 키워주게 됩니다. 흔히, 음유시인이란 부류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것은 동양도 마찬가지여서 권력자의 집에는 그를 찬양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식객(문객)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권력자의 권력이 강해질 수록 자신들 역시 그 권력을 나누어 받곤 했습니다. 즉, 오래 전에 문학은 권력의 하수인이었습니다.

이런 관계가 변화를 맞게 된 계기는 바로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계급의 붕괴와 인쇄 기술의 발달 때문이었습니다. 계급이 붕괴되면서 작가들은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 줄 귀족층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이 상황은 필연적으로 대중에게 먹히는 글을 써야 하는 단계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전까지 글은 거래의 수단이 될 수 없었습니다. 즉, 상품이 아니었고, 그래서 팔아서 돈을 마련하는 물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1920년 대부터 신문사, 잡지사, 출판사 등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글은 원고료(돈)를 받는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즉, 이제 더 이상 권력자 밑에서 그들을 위한 찬가를 만들어 바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문학평론가 김현 씨는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즉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문학은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진실한 삶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밝혀 준다. 그리고 무의미한 삶을 자각하지 못하는 일상인의 무딘 의식을 추문으로 만든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결국, 문학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동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에게 세상은 그 동굴 안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 동굴은 익숙하고 편한 곳이니까요. 하지만 어느 날, 그 동굴인 중 한 사람이 우연히 동굴 밖을 나와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과 바람에 살랑거리는 푸른 들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는 숲의 나무들을 보게 된다면 다시 그 동굴에서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역할입니다. ‘자, 날 따라와 봐. 동굴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야. 동굴 밖에는 또다른 더 넓은 진짜 세상이 있어.‘라고 알려주는 것. 그들이 모르고 있던 사실, 혹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사실이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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