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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콘텐츠연구소 Mar 08. 2022

우리가 몰랐던 삼국시대 이야기.2.(2)

2. 끝없는 분열의 시대(2)

2. 끝없는 분열의 시대(2)


5) 백제 다시 알기

우리는 비록 고려 시대에 쓰였지만 지극히 중국에 사대적이며, 신라의 시각에서 쓰인 <삼국사기>의 내용을 의심해야 합니다. 먼저 백제에 대한 정보를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백제는 아시아 최초의 해상 왕국으로 요서 지방은 물론 산둥 반도와 그 밑의 상해 지방까지 오가던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그 구성원도 무척이나 다양했는데, 북부여족 + 말갈족 + 왜족 + 장족(중국 동해안은 물론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까지 포함하고 있는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당나라의 역사서인 <양서>, ‘백제전’에서는 백제를 ‘22개 담로(다물)로 이루어진 연맹 국가’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담로란 백제의 자치기구를 의미합니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수나라 역사서인 <수서>에서도 ‘백제에는 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섞여 있으며, 중국인도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앞서 설명한 담로(다물)이란 ‘담울타리’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 담로국(탐라, 탐모라, 담라, 탁라)에 해당하는 곳들이 옛 제주를 포함하여 왜와  중국 북부의 요서 지방, 남부의 광서성 등은 물론 타이완과 스리랑카까지 뻗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 신라는 물론 수, 당을 뛰어넘는 해상지배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직접 신하들을 왕이나 제후에 봉하는 일종의 황제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백제 왕이 신하를 왕이나 제후위에 봉한다.’ 

                                                                                                                  – <송서>, <남제서>


‘백제는 옛 동이로부터 시작되어 마한에 속한다. 진나라 말기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자, 낙락(백제) 역시 요서에 진평현을 차지했다. –중략– 백제는 고마라고 부르는 도성을 다스리며 지방 읍을 담로로 부르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다. 22개 담로는 왕의 아들, 형제, 종친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한다. 주변의 작은 나라들 반파, 탁, 다라, 전라, 시라, 지미, 마연, 상사문, 하침라 등이 백제에 속한다.’ 

                                                                                                             – <양직공도>, 백제사신


위와 같은 사료들을 정리해 보면 결국 백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꽤 거대한 해양 제국의 종주국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6) 고구려 다시 알기

고구려는 고조선의 정통 후계자로 육상지배권을 지닌 기마종족 연맹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의 경쟁은 결국 고조선의 후계자라는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경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고구려 정통성에 대한 백제의 견제라고 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지리적으로나 세력적으로나 고조선 이후 부여가 그 자리를 차지했고,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는 결국 부여를 흡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이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구려는 지리적 한계(농지 부족)로 인하여 끊임없이 주변 국을 공략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 후에 그 자리를 차지한 몽고족이나 여진족 등이 중국이나 한반도를 끊임없이 침략한 까닭과 같습니다. 그러나 7세기경 이러한 주변국에 대한 공세에서 수세적인 주도권 경쟁을 선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천리장성의 축조입니다.

주변국에 대한 공세를 멈추고 수세로 돌아선 세력들은 멸망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진나라와 시황제입니다. 진시황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며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차지했지만, 북방 흉노족의 침탈이 끊이지 않자 만리장성을 쌓고 수비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 세워진 이 최초의 통일 제국은 기원전 214년 만리장성을 쌓으며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기원전 210년 그가 사망하자 4년 뒤에 멸망해 버립니다.

고구려 역시 이와 같았습니다. 끊임없이 주변국과 마찰을 통해 성장했던 고구려는 명나라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움츠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장장 16년에 거쳐 천리장성을 쌓았고, 이것이 647년 완공됩니다.

하지만 고구려 역시 이후 약 20년 만에 연개소문의 뒤를 이은 아들들의 내분으로 인해 허무하게 멸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7) 신라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

신라는 스스로도 자신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기 보다는 삼한을 통일했다는 표현을 더 자주 썼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삼국통일이란 표현이 나타나지 않으며, <삼국유사>에서만 두 차례 등장합니다. 대신 ‘삼한통일’이라는 표현만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신라는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와 상관없는 이민족의 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마한 지역을 점령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변한, 진한 지역과 합하여 ‘삼한통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통일 군주를 고구려를 멸망시킨 문무왕이 아닌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으로 인식하고 있던 당시 신라인들의 표현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선왕(태종 무열왕) 께서는 백성들의 참혹함을 불쌍히 여겨 귀한 신분 임에도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건너가 병사를 요청했다. 선왕께서 비록 백제를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미처 멸망시키지 못했는데, 과 인이 평정을 이루는 유업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됐다. 지금 두 적국은 이미 평정돼 사방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 <삼국사기>, 문무왕 9년(669년) 2월 21일의 기록


‘과인은 어지러운 운을 타고 태어나 전쟁의 시대를 만났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영토를 평정했다.’ 

                                                                                               - <삼국사기>, 문무왕 21년의 기록


‘당나라 중종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과 신라 태종 무열왕의 묘호가 같으니 이는 너희들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빨리 칭호를 고치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해 신문왕은 신하들과 의논한 뒤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선왕 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당나라 태종의 묘호와 같다. 그러니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선왕 춘추는 삼한을 통일(一統三韓) 한 공적이 매우 크다.

우리의 이런 점을 황제께 잘 말씀해달라.’

                                                                                       - <삼국사기>, 신문왕 12년(692년) 기록


‘(혜공왕 때에)  태종대왕(무열왕)과 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적이 있었다 하여 모두 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으로 삼았다’

                                                                                                          - <삼국사기>, 잡지 ‘제사’


‘태종이 김유신과 함께 신비스런 지략과 온 힘을 다해서 삼한을 통일하고 사직에 큰 공을 세웠기에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

                                                                                                           - <삼국유사>, 태종춘추공


‘신라 신문왕 때 당 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무열왕에게 올린 태종이라는 호칭을 고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신라왕은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무열왕이) 거룩한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  국을 통일(一統三國) 했기에 (무열왕의 묘호를) 태종이라 한 것입니다” 라고 답변한다.’

                                                                                                          - <삼국유사>, 태종춘추공


‘경주 동북쪽 20리 쯤에 있는 무장사를 소개하면서 문장 마지막에 “세상 사람들이 말 하기를, 태종이 세 지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묻었기 때문에 무장사(鍪藏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라고 기록했다.’

                                                                                                      - <삼국유사>, 무장사 미타전


위와 같이 통일 군주에 대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틀어 7차례의 언급이 나타나는 데, 태종 무열왕이 4차례, 문무왕이 3차례 언급됩니다. 즉, 고구려의 멸망이 아니라 그전에 있었던 백제의 멸망까지를 통일로 인식했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인식이 고구려 멸망 30년 후인 698년 발해의 건국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처음부터 고구려 지역을 자신들의 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이제 명나라가 차지한 지역에 새로운 나라가 등장한다고 해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 지역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인식했다면 그곳에서 새로운 나라가 건국된다고 했을 때,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오직 명나라의 요청으로 발해에 군사를 보냈다가 날씨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물러난 뒤에는 다시 병력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발해는 북부여 일족인 대조영이 돌궐족과 말갈족을 끌어들여 만든 나라입니다. 즉, 앞서 말했던 고조선 – 고구려를 따라 기마종족 연맹의 뒤를 잇는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이들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배척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 민족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배신자로 낙인이 찍힙니다. 오랜 세월 함께한 세력들을 배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힘을 얻어 중국에서 힘을 키워 일어났을 때, 그들은 늘 한족의 편을 듭니다.

요(거란)와 송, 원(몽고)과 명, 명과 청(만주)이 세력 싸움을 벌일 때마다 한족의 편에서 그들과 싸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오랑캐(동이족)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즉, 신라의 통일 이후 한 갈래였던 민족들과 분열했으며, 몽골 지역을 넘어 더 위쪽까지 뻗어나가던 기상은 거란, 여진, 몽고, 돌궐 등에 가로 막혀 움츠러들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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