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를 소개하며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애써도 아무도 안 알아주는, 티도 안 나고, 생색도 낼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나는 사라진 채, 누구의 엄마로 살아가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때론 깜깜한 터널 속에 혼자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지치고 힘들고 빨리 그 시간이 지나길 바랐다.
왜였을까? 아이를 키우는 요령도 없거니와 큰 아이를 길러 봤다고 작은 아이를 키우는 게 쉬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마다 특성이 다르고 결이 달랐다. 정답은 수십 가지, 어려움은 우주 최강을 자랑하는 수수께끼의 연속이다. 아이들이 지지고 볶고 싸우면 솔로몬을 자처하며 중재해야 했고, 키 작은 아이들을 먹이는 건 매번 고민스러웠으며, 놀아줘도 지치지 않은 아이들과 240시간 같은 하루를 보냈다. 잘 때는 또 어떤가? 아이들 틈에 끼어 다리 한쪽 치우고 나면 팔 한쪽이 올라와 있는 샌드백 신세였다. 한마디로 수면의 질 따위는 생각할 수 없는 삶이다.
열심을 내며 애씀에도, 나를 우주처럼 세상 전부처럼 생각하는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커다란 허들을 겨우 넘었는데 계속해서 산 같은 허들들이 줄지어 있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계획대로 되지 않음에 뜻대로 될 수 없음까지 추가되며 내려놓음의 연속이었다.
전에는 못하는 것은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못하면 안 한다. 못하는데 왜 하냐?’ 일의 효율성을 강조하며 포기 절차를 밟은 건 당연했다. 아이를 키우는 건 못해도 산전수전 공중전을 펼쳐서라도 해 봐야 하는 일이었고 ‘나의 몹시 못함’을 매번 인정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 있었다. 돌아보면 왜 그렇게 힘들게만 생각했을까? 싶지만, 다시 젊어진다 해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고 치열한 삶이었으리라 믿으니까.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뇌의 시간’도 글로 쓰다 보니 웃을 수 있었다. 다 지난 일이니까 너그러워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군분투한 주인공이 나라서 좀 짠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아이를 키우는 것은 ‘도를 100번씩’ 닦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 속에서 나는 아이들에게만 굉장히 헌신적인 삶을 산 줄 알았는데, 나름 숨 돌릴 ‘나만의 삶’도 살아가고 있었다. 달리면서 고통은 고통으로 맞받아쳤고, 새롭게 피아노와 글 쓰는 과정을 배우면서 마음의 허기 또한 채워갔다. 심지어 방송 댄스까지 하는 위엄을 발사하게 될 줄이야? 진정 나이가 들어서 재밌게 노는 법을 알아가고 있다.
내가 범접할 수 없다고 여긴 틀들을 부수는 시기. 못해도 한번 용을 쓰며 해봤더니 그다음은 아주 조금(개미 눈곱만큼) 쉬워진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물론 용쓴다고 용이 되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힘들고 넘어지는 일들도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나를 다독이며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조금은 관대해지려고 한다. 완벽이라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잔뜩 들어간 ‘뽕(힘)’이 살며시 빠진다. 에너지를 비축한 만큼, 앞으로 한 발짝 나갈 때 요긴하게 사용된다.
못 하는 것을 묵묵히 때론 씩씩대며 받아들이는 10년의 과정. 그 속에서 나는 산산이 깨지고 다치고 무너지는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의 버팀과 견딤, 때론 쉼표로 인해 살포시 웅크렸던 시간까지,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자양분이 됐다. 마치 탄소 덩어리가 연마되어 다이아몬드로 탄생한 것처럼 치열하게도 성장통을 겪었다. 나라는 사람을 키우고 스파르타로 훈련 시킨 절대적인 시간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지금, 어둠의 터널을 지나 쏟아지는 빛과 만나는 중이다. 나는 육아로 다져진 잔근육을 만든 덕에, 너무나 재밌는 삶이 펼쳐지고 있다. 이제야 나의 연약함이 단련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다만 그때의 나에게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는 확신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덜 흔들렸을 텐데. 부단히도 애썼구나. 고생했어.”라며 꼭 안아주고 싶다. 앞으로 10년 뒤의 나에게도 “힘들어도 넘어져도 또 잘 견뎌낼 줄 알았어! 이렇게 눈부시게 성장할 줄이야.”라며 두 손 모아 응원하고 싶다.
“경로 이탈 중입니다.”라고 울어대던 비상 신호는 “더 신나는 경로로 검색되었으니, 엉덩이 씰룩 흔들며 즐겁게 가 주세요.”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잘못 들어가 버린 길이 오히려 새로운 통로로 연결된 것이다. 당황스럽더라도 마음을 다시 부여잡고 “앗싸. 얼마나 더 멋진 길이 펼쳐질까?” 기대하며 그냥 즐기면 된다. 큰 변화는 작은 움직임의 합으로 온다. 그 시작이라는 사건을 통해 꿈꾸던 삶을 조금씩 다가가며 닮아가고 있다.
아무리 내 삶을 성장시킨다고 해도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여전히 쉽지 않다. 말해 뭐하겠는가? 아직도 내 몸은 온전히 내 몸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쉼 없이 불리고 여전히 손이 100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내가 알록달록 울트라 파워레인저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한다. 요리하는 빨간 엄마, 공부 가르치는 노란 엄마, 놀아주는 파란 엄마, 고민을 상담하는 녹색 엄마, 갖고 싶은 걸 사주는 럭셔리한 주황 엄마까지. 내 역할을 하도록 위임하고 나는 신나게 나가 놀고 싶다. 현실은 내 시간의 반절 이상을 여전히 아이들에게 반납하고 남은 반절은 신명나게 노는 걸로 마지 노선을 정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쓰는 그 반절의 시간이 반의 반절로 줄어 나의 노는 시간이 쭉쭉 늘어나 있길 기대하면서.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이모, 형제나 자매, 그 밖의 여러 형태의 가족들이 “잘하고 있다”고 토닥이며 오늘을 잘 견뎠으면 좋겠다. 함께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감사가 무엇인지, 나는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알았다. 좀 더 일찍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행복감을 느끼며, 잘 누렸으면 한다. 서로의 따뜻한 체온이 오늘 하루를 견디고 웃게 만드니까. 하루하루의 힘듦이 앞으로 나아가며 성장하게 할 소중한 계기가 된다고 믿고 힘찬 발걸음으로 나아가길 기도한다.
#파워레인저같은엄마가되고싶은나
#새로운길에더기대하며나아가길
#짠한주인공이나여서조금은힘들었지만
#비축한에너지로한발자국나아가며
#프롤로그를이제야쓰는
#나의모든날을응원하며
#용을쓰며씩씩대며해낸육아의길
#행복과성장인있는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