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첩국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고 느낄 시기, 아직 밤이 낮보다 길어 깜깜했던 새벽녘 즈음에 밖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재치국 사이소~~"
단잠을 자고 있던 나는 잠결에 어렴풋이 깨서 듣고는 다시 잠들기도 했다.
언젠가 일찍 일어나 있던 중에 골목길을 지나가는 그 소리가 또 들리고 엄마가 문을 열고 아주머니를 부르셨다.
큰 통을 머리에 이고 계신 아주머니가 들어오셔서 마당에 이고 있던 통을 내려놓으셨다.
엄마는 냄비를 들고나가 통 안에 있는 음식을 받으셨는데 재첩국이었다.
재치국은 재첩국의 경상도 사투리였었고 아주머니가 새벽마다 재첩국을 머리에 이고 다니시면서 파시는 거였다.
아주머니는 냄비에 재첩국을 덜어 주시고는 잘게 썬 정구지를 위에 뿌려 주셨다.
새벽의 그 재첩국은 전날 술을 드시고 오신 아버지의 해장용이었다.
그 뒤로도 종종 엄마는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 다음날이면 새벽마다 종종 정구지가 소복이 뿌려진 재첩국을 사서 아빠의 아침상에 놓아 드렸다.
초등 저학년 정도였던 나는 재첩국을 살짝 떠먹어 봐도 조개와는 또 다른 향과 밍밍한 맛의 이 국을 맛있다고 느끼진 못했었다.
파도 아니고 정구지를 왜 국에 넣어 먹는지도 모르겠지만 새벽녘마다 들려오는 소리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이 흥미로워 그 뒤로도 잠결에 엄마가 재첩국 아주머리를 부르시는 소리가 나면 부스스 일어나 나와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는 재첩국 거래 실황을 구경하곤 했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그 시절의 엄마 나이가 되니 가끔씩 재첩국 팔러 다니시며 목청껏 외치시던 소리와 큰 통을 이고 대문을 들어오시던 모습이 잔상처럼 아련하게 기억이 날 때가 있다.
밤새 재첩을 다듬어 끓이고 한가득 통에 담아 골목골목을 누비시던 그 모습이 얼마나 고단한 여정이었을까.
누군가의 어머니, 아내, 딸, 며느리였을 그분들이 이고 다니셨을 재첩국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인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세상의 변화를 시간 단위로도 실감할 수 있는 요즈음이야 재첩국이 먹고 싶다면 몇 번의 클릭으로 여러 지역에서 생산되고 조리된 재첩국을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기에 재첩국 한 그릇에 담긴 의미가 맛과 영양 그 이상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재첩국의 맑고도 깊은 맛을 알 수 있는 나이기도 하지만 먹을 때면 재치국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라 더 깊고 묵직하게 느껴진다.
* 부산에서 재첩국을 많이 팔게 된 이유 : 재첩국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부산으로 온 피란민들이 저렴하게 허기를 채우고 해장을 하던 서민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 부산 사상구 삼락동, 북구 구포동, 강서구 명지/하단/엄궁 등 낙동강 하구는 재첩이 지천으로 나던 곳이었다.
재첩은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기수역(汽水域)에서 잘 자라는데 낙동강 하구가 그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새벽에 손수레에 재첩국 동이를 싣거나 머리에 이고 직접 팔러 다니는 재첩국아주머니들의 행상 문화가 활발했다.
재첩이 많이 나던 삼락동 지역에는 재첩국 전문 식당들이 생겨나 '삼락동 재첩 골목'이 형성되었다.
1987년 낙동강 하구 둑이 완공되면서 민물과 바닷물의 교류가 막히고 수질이 변하면서 낙동강 재첩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에는 부산에서 재첩국 파는 곳이 줄어들거나 다른 지역의 재첩을 사용하게 되었다.
재첩은 단백질, 철분등이 풍부하지만, 비타민 A의 함량이 높지 않아서 비타민A의 전구체인 베타카로틴이 풍부한 부추와 함께 먹으면 부족한 영양소를 상호 보완해 주는 효과가 있다.
한의학적으로는 찬 성질의 재첩과 따듯한 성질의 부추가 서로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하여 궁합이 잘 맞는 식재료로 알려져 있다.
정구지 : 부추의 경상도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