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의 시작을 복국과 함께
성장기를 부산에서 보냈던 나는 항상 1년의 시작은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서 해돋이 행사로 문을 연다.
가족 모임을 좋아하시고 주선하시는 둘째 큰아버지의 지휘하에 해마다 하는 해돋이는 매년 중요한 집안 행사로 자리 잡았다.
해돋이 행사에 참여하려면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데, 해뜨기 전 제일 농도가 짙은 어둠 속에서 무겁게 짓누르는 잠을 이겨내기가 고작 초등학생이었던 내겐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매년 빠지지 않고 해돋이를 보러 갔다.
큰아버지 가족, 우리 가족, 작은 아버지 가족, 큰고모네 가족, 작은 고모네 가족 대체로 이렇게 다섯 가족이 모였다.
더 많은 아버지의 형재들이 있지만 타지에 사시는 분들을 제외하고 근거리의 살고 있는 다섯 가족이 항상 행사를 함께 하는 가족 구성원 들이었다.
약속된 장소인 달맞이 고개에 약속된 시간에 모인다.
명칭은 달맞이 고개이지만 해운대 북동쪽에 위치한 이 언덕은 해맞이를 하기에도 최적인 장소였다.
야트막한 언덕에 바닷가를 바로 앞에 두고 있고, 80~90년대에는 조용하고 전망이 좋아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주상복합 대단지들이 많이 생겨남으로써 주거자역을 그리고 옮겨 가고 지금은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많은 곳이다.
달맞이 고개 곳곳에 자리를 잡고 나면 바닷바람에 한기라도 들까 봐 꽁꽁 싸매고, 신발을 뚫고 올라오는 냉기를 떨쳐 내고자 제자리걸음으로 연신 탈바꿈을 해주면서 기다리다 보면 어스름한 빛이 주변을 감싸 들기 시작하고 다들 해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수평선 위로 빨간 해가 이마를 내밀었을까, 새해의 일출을 맞이했다는 내적 감동도 잠시 큰아버지는 항상 "나는 할 수 있다!!" 외치게 하셨다.
목청껏 소리쳐야 한다. " 나는 할 수 있다아아아!!!"
매년 하는 과정 중의 하나였지만 할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애들도 어른들도 한다. 다 같이 하니까 안 할 수가 없다, 안 할 재간이 없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라도 그렇게 큰소리로 복창하고 나면 뭔가 한 해가 잘 흘러갈 것 같기도 하고...
해가 제모습을 다 드러내고 나면 슬슬 다음 코스로 행한다.
새해 첫 아침식사로는 늘 복국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바닷바람에 에이고 추위에 언 몸을 따듯하게 데워 주는 메뉴로는 새벽시간 해운대에서 복국이 최적의 메뉴였겠지만 솔직히 초등학생이었던 그 시절의 나는 복국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몰랐다.
하얗고 몽글몽글한 모양을 한 생선살도, 콩나물과 미나리가 듬뿍 담긴 말간 국물은 몇 번을 먹어도 특별할 것이 없었던 기억이다.
그 특별할 거 없는 그 맛이 특별한 맛이라는 걸, 식재료의 신선함과 조리하는 분의 정성과 신념의 결정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강산이 한두 번쯤은 바뀌고 나서야 알았다.
살점을 좀 먹다가 콩나물과 미나리를 좀 집어 먹다가 국물을 떠먹어 보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어른들은 테이블 한편에 목뼈가 소복이 쌓여 있고, 해장이라도 하시는 듯 뚝배기를 기울여 마지막 국물까지도 싹싹 긁어 드셨다.
해돋이와 복국은 실과 바늘처럼 매년 함께 했다.
시간이 돌고 돌아 이제는 내가 그 시절의 우리 어른들 나이가 되었다.
찬바람이 불 때쯤이면 복국의 그 말간 국물이 생각난다. 마트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줄기가 통통한 콩나물과 뚝배기 가득한 미나리의 향긋함이 뜨거운 국물과 함께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면 가라앉아 있던 위장을 깨우는 기분이 든다.
아이들과 함께 부산으로 가족 여행을 가면 한 끼로는 꼭 해운대에서 복국을 먹고 온다. 맵지 않은 음식이라 아이들도 잘 먹을 수 있을 거라며 복국집으로 가족을 이끌지만 사실은 잠자고 있던 나의 추억 속의 맛을 살리고 싶어서이다.
그 시절의 나처럼 아이들은 아직 복국의 맛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잘 먹게 하려고 복튀김등 다른 메뉴도 시켜줘 보지만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특별할 거 없는 말간 맛이다.
표정들을 보면서 입가에 나만 아는 웃음이 그려진다.
이 경험들이 쌓여 시간이 흐르고 나면 너희들도 엄마처럼 찬바람이 불 때 말간 그 국물이 생각나 복국집을 검색하고 있는 날이 오겠지.
*부산에 복국집이 많은 이유는 남해 연안에서 어획되는 복어와 수입 복어의 유통 및 최대 집산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선한 복어를 쉽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복어 요리가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미나리, 콩나물, 무 등을 넣어 맑게 끓이는 부산식 복국은 시원하고 개운한 맛으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