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을 배우는 중
조금 전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뭐 하니?”라는 물음에 나는 다음 주 수업 준비 중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오늘 어머니가 피부과에 가야 되는데 내가 같이 가줄 수 없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순간 짜증이 났다. 오늘은 오랜만에 그동안 미뤄놓았던 일을 하면서 조금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전화로 인해 나의 ‘오늘’이 흐트러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금 이따 다시 전화드릴게요”하고 전화를 일단 끊었다.
짜증으로 시작된 나의 감정을 돌아보았다. 짜증이라는 감정 뒤에 금세 죄책감이 밀려왔다. 못된 것.. 만약 이 전화가 내 아이에게서 왔더라도 그렇게 대했을까? 짜증은 커녕 걱정으로 안달이 났을 것이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 해도 어찌 이렇게 다르게 반응했을까? 어찌 아버지 전화를 받으면서 걱정보다 힘들게 가야 된다는 생각, 5시 넘어 돌아올 때 막혀 고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먼저 했는지 모르겠다.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의 모습
언제부터 부모님 댁에 가는 것이 즐거움보다는 책임처럼 느껴지게 된 걸까? 10여 년 전, 부모님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내려가겠다고 하셨을 때만 해도 두 분은 매우 건강하셨다.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며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댁을 방문하는 것은 마치 익숙한 휴양지를 가는 기분이었다. 서울의 복잡하고 바쁜 일상을 벗어나 그야말로 공기 좋고 바다 좋은 휴식의 시간이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파킨슨 증후군 진단을 받으시고 두 분은 서둘러 일산으로 올라오셔서 새로운 거쳐를 마련하셨다. 주변에 호수공원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서울과도 가히 멀지 않아 자식들도 오가기 불편하지 않은 거리였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도 휠체어를 타셨지만 의사소통에 문제없었고 운동도 하셨었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는 이제 거의 움직이지 못하시고 말씀도 거의 못하신다. 다행히 아버지는 건강하신 편이고 입주 요양사가 돌보고 있는 상태이다.
나이 듦을 바라보는 시각
관계의 유지는 힘의 ‘균형’에서 온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다면 관계가 유지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자식과의 관계 역시 균형적 거래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균형을 생산성이나 물질적 거래로만 판단하기 쉽다. 나이 들면서 힘은 없어지고 사회에서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제외되면서 생활 범위도, 영향력의 범위도 좁아진다. 생산성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현대사회에서 나이 든 이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이들의 존재는 ‘쓸모 있음’ 보다는 ‘부담’으로 인식되기 쉽고, 그만큼 그들에 대한 대우와 가치는 줄어든다. 그렇게 생산성이나 물질적 거래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시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힘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건 나이 듦과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너무나도 협의적이고 편파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부모님을 ‘돌본다’고 여겼고 그 돌봄의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돌봄이 그게 전부는 아닌데 말이다.
돌봄의 모습
돌봄에는 물리적 돌봄 뿐 아니라 정서적 돌봄, 그리고 관계적 돌봄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는 나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말 한마디 없이도 존재 자체로 정신적 안정을 주는 존재다. 조건 없는 사랑,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따뜻한 지지가 그분들에게서 늘 나온다. 그런데도 내가 그분들을 찾아뵙는 행위를 일방적 ‘돌봄 제공’이라고 생각하며 책임을 진다고 생각한 것이 부끄럽다. 참으로 얄팍한 마음이었다. 그분들의 삶을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더 깊고 확장적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우리 아이들의 힘듦을 한없이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나를 그렇게 바라보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하루의 불편함으로 그들의 사랑을 감히 외면하려 했던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다.
누군가 말했다. “당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부모님으로부터 돌봄이,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돌봄이 있기에 나는 행복한 것이다.
당장 전화를 드려서 병원에 함께 가겠다고 말씀드려야겠다. 부디 부모님의 오늘 하루가 나의 작은 돌봄을 통해 조금 더 행복하고 평안하셨으면 좋겠다. 내가 그분들의 돌봄으로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